SEASON/SPRING

[린슬] Mellow Talk

김붕대 2018. 4. 1. 00:10

 



theme / 썸

w.빈제이






전공 수업을 막 마치고 강의실에서 나오는 길이었다슬기는 꾸깃한 악보지를 추리며 어정쩡하게 걸었다그때 누군가가 슬그머니 제 팔뚝을 붙들었다.

 

뭘 그렇게 집중해?”

안녕하세요.”

누가 인사하래뭐에 정신 팔렸냐고 물어봤는데.”

 

주현이 팔을 놓고 짓궂게 웃었다실실대는 꼴에 영 착잡해졌다슬기는 악보를 대충 반으로 접어 가방 안에 구겨 넣었다그걸 본 주현이 실없이 말을 덧붙였다악보 소중히 할 줄 모르는 애네진짜.

 

언니.”

?”

저한테요.”

.”

왜 이렇게 집적… 거리세요?”

?”

 

큰 농담이라도 들은 것처럼 주현이 깔깔거렸다자칫하면 뒤로 푹 넘어갈 기세였다웃긴가내 말이대체 어디가?

 

그런 거 아니고너 작곡도 해요즘?”

정 교수님한테 기초부터 조금씩 배우고 있는데.”

앨범 내려고?”

아니요재밌어 보이길래 그냥 호기심으로 하는 거예요.”

그래의외네그래도 잘 배워둬그거 조금만 다룰 줄 알아도 써먹을 데 되게 많아.”

근데저한테 용건 있는 거 아니었어요?”

 

주현이 그제야 뭔가 생각난 듯이 주머니를 뒤적였다하얗고 작은 손바닥 위에 얹어진 것은 열쇠키였다모양이 익숙한.

 

정 교수님이 3시에 미디실로 오래이제 드럼 막 찍는다며.”

……

언니 로직 좀 할 줄 알거든모르는 거 있음 물어봐다 가르쳐줄게.”

감사해요.”

감사하긴좀 이따 앙상블 때 봐.”

 

주현이 슬기의 손에 키를 쥐여주곤 어깨를 슬쩍 밀었다뭘 그렇게 굳어있어맨날언니 무안하게분위기를 풀겠답시고 던진 말에 슬기는 더 짙게 얼었다주현은 늘 이런 식이었다무게 없고 가벼웠다.

 

긴장 풀어.”

……

집적거리는 거 아니구전혀.”

 

우스갯소리라도 들은 듯이 주현이 히죽거렸다슬기의 손등을 쿡 찌르곤 주현은 반대편 복도쪽으로 빠르게 멀어졌다방금 뭔일이 있었던 거지슬기는 제자리에 서서 멀뚱히 눈만 끔뻑였다한참 뒤에야 애먼 자각이 들었다.

 

또 당했다배주현 저 능청스러운 인간한테.

 

 

 

Mellow Talk

 

 

 

주현이 슬기의 존재를 인식한 것은 MT때 술자리에서였다그저 이름과 얼굴을 드문드문 알고 있는 것과 확실하게 인지한다는 건 아무래도 차이가 컸다. 3월 중반의 MT는 의무적으로 치러지는 행사와 같았다굳이 천안으로그것도 2박 3일씩이나 일정을 잡은 학교 측을 대부분의 무리들은 혐오했다대개 놀기 좋아하는 족속들만 모여있는 과인데도 반응이 그저 그랬다주현은 버스를 타고 오는 내내 멀미를 했다약을 미리 먹었지만 별 효과는 없었다방지턱을 넘을 때마다 토기가 쏟아질 것 같았다눈을 감고 어서 이 버스에서 내릴 수 있기만을 빌었다.

 

그나마 위안이 된 건 작년보다 장소가 번듯해졌다는 거였다큰 콘도 하나를 통째로 빌렸다고 했다이제 수순처럼 먹고 마시고 뻗는 의례가 다겠지주현은 아쉽게도 시끌벅적한 분위기를 좋아하지 않았고 술맛도 잘 몰랐다어느 자리나 다 그렇듯이 늘상 나서던 인간들만 난리를 쳐댈 게 뻔했다.

 

도착하자마자 짐을 풀고 옷을 갈아입었다과자를 뜯어먹으며 재미도 없는 게임을 하고 선물을 나눠주고어째 레퍼토리가 작년이랑 이렇게 똑같을 수가 있지차례를 진행하는 MC들의 과장스러운 모션마저도 작년과 똑같았다주현을 혀를 차며 콜라를 들이켰다아이스박스에 잘 넣어들 왔다더니 어쩐지 밍밍하고 미지근했다.

 

몇몇은 자처해 바깥에서 고기를 구웠고 대부분은 널찍한 거실에 테이블을 펴놓고 멍하니 앉아 있었다몇 년째 졸업을 못해 화석으로 썩어가고 있는 복학생 선배가 마이크에다 대고 호탕한 목소리를 울렸다이제 막 자주 보게 될 사이니까 서로 통성명도 하고 좀 친해져무슨그래봐야 학기가 진행되고 시간이 좀 지나가면 빠질 사람들은 다 알아서 빠져나가기 마련이었다누구는 자퇴를 하고누구는 편입을 하고누구는 아예 과를 바꿔타고.

 

대개 나이가 많거나 고학번인 선배들은 구석 테이블에 박혀 교수님과 술을 나누거나 끼리끼리 뭉쳐 수다를 떨고 있었다주현은 배정된 테이블을 쭉 둘러보며 난데없는 사실을 깨달았다옆에 앉은 동기인 윤정과 저를 빼고 나머지는 전부 다 신입생이라는 걸우리가 제일 선밴가좀 웃기다윤정이 술잔에 맥주를 따르며 큭큭거렸다어차피 1학년이나 2학년이나 거기서 거기였지만마주 앉아있는 얼굴들은 긴장에 바짝 기가 죽은 채였다선배 노릇이라 칭하기엔 좀 우스웠다주현은 그래도 밥은 편하게 먹을 수 있는 자리가 좋았다되도록 분위기를 유하게 풀 필요가 있었다.

 

다들 나이랑 이름이 어떻게 돼요우리 간단하게 통성명 정도는 할까요구식적인 멘트를 뱉자마자 한숨이 나왔다작년만 해도 딴엔 나름 어렵고 신선한 질문이었는데철저하게 그건 받았을 때의 입장이지던질 때는 또 달랐다죄다 시시했다주현은 이래서 의무적인 행사나 술자리들이 싫었다애써 진부하고 식상해지는 걸 무릅써야 하니까.

 

모두들 서툴게 더듬더듬 자기소개를 할 때 유독 주현의 눈에 한 사람이 밟혔다그는 분위기나 상황 따위는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이 우적우적 고기만 씹어먹고 있었다며칠 굶기라도 한 것처럼 필사적이었다욱여넣지 않으면 누가 혼내기라도 하는 것마냥참 열심히 먹네주현은 대각선에 앉은 사람을 바라보며 저도 모르게 픽 웃었다.

 

그쪽은 이름이랑 나이가 어떻게 돼요?”

 

테이블에 시선을 고정하고 음식만 씹어대던 고개가 그제야 들렸다저요상황 판단이 느린 모양이었다그것도 아니라면 기척을 느끼는 데 둔감하던가.

 

저는 스무 살이구요강슬기예요전공은 보컬……

 

여기 그거 모르는 사람 아무도 없어그새 친해진 건지 옆자리에 앉은 애가 장난스럽게 슬기를 밀쳤다그런가듬성한 어조가 테이블을 금세 웃음바다로 만들었다아직 미처 벗지 못한 특유의 어리숙함이 있었다주현은 그때는 차마 몰랐었다그게 열아홉 살 티가 덜 빠진 게 아니라 아예 슬기의 성격이라는 걸.

 

그러는 언니… 언니몇 살이세요?”

 

슬기가 젓가락 하나를 입에 물고 맹하게 물었다.

 

스물세 살이요삼수 했거든요그냥 혹시 모를까봐 얘기하는 건데 2학년이에요.”

.”

 

이런 낯간지러운 소개를 또 하고 있다니어쩐지 머쓱했다주현은 뺨을 긁으며 자리에 앉은 사람들에게 술을 권했다빼지 못할 분위기에 거의 곧이곧대로 받아마셨지만 슬기만은 예외였다죄송해요제가 술을 못해서의외로 거절이 단호했다할 수 없죠저도 억지로는 안 먹여요말은 그렇게 했어도 단번에 거부당한 술잔은 조금 무안했다주현은 슬기의 옆모습을 힐긋 훔쳐보며 거품이 다 죽은 맥주를 삼켰다무진장 쓰고 비렸다.

 

술이 한창 도는 자리엔 금세 노래판이 벌어졌다자기가 잘난 걸 아는 인간들은 취기가 오른 탓인지 죽자고 마이크를 안 놨다다른 애들도 놀게 좀 빠져학번이 높은 여 선배가 주정 부리듯 흥얼거리는 홍윤의 등짝을 내리쳤다. 1학년 애들 중에 한 곡 할 사람도윤이 마이크를 흔들며 싸이키 조명을 켰다없어콘도엔 이미 취한 사람들 때문에 술 냄새가 가득이었다그때였다저 한 곡만 해도 돼요얌전히 고기만 씹던 슬기가 대뜸 손을 들었다두 말 하면 입 아프지무대로 나오시죠도윤이 능청스러운 톤과 함께 슬기에게 마이크를 넘겼다.

 

주현은 흐물한 땅콩을 까며 멀거니 번쩍거리는 모니터를 바라봤다리모컨을 뚝뚝 눌러대는 슬기의 손가락이 가늘었다까맣고 흐린 불빛 안에서도 그런 게 잘만 보였다무슨 선곡을 할까 싶은 찰나에 익숙한 멜로디가 울렸다몇몇 사람들이 야유와 환호성을 동시에 질러댔다반주기에 찍힌 세 자리 숫자가 반짝였다정수리 위로 색색깔의 조명이 요란스럽게 떨어졌다슬기는 간주에 맞춰 살랑살랑 율동 비슷한 걸 추고 있었다그대 모습은 보랏빛처럼 살며시 다가왔지예상 밖의 첫 소절에 주현은 눈썹을 푹 꺾었다조용하더니 의외로 웃긴 구석이 있네바닥에 퍼져 누워있던 남자들이 소리를 지르며 왁자지껄하게 웃었다대박 여기 미사리냐쟤 몇 년생인데 저런 걸 불러제껴?

 

마이크를 쥔 채 몸을 까딱대는 모습이 어째 퍼덕거리는 물개 같았다귀여워존나 재롱떠는 것 같다윤정이 보란 듯이 주현의 옆구리를 툭툭 쳤다생글생글 웃고 있는 모습은 순진한 걸 넘어 해맑기까지 했다뒤에서 가만 구경을 하던 노교수가 취했는지 겉옷 점퍼를 흔들며 목소리를 높였다강슬기 완전 하이틴 스타 뺨친다진심인지 의무인지 모를 웃음소리가 한꺼번에 뭉쳐 귀를 때렸다인간들 하여간에 시끄러워주현은 어깨를 움츠리며 단상 위에 올라선 슬기를 빤히 올려다봤다목소리가 꽤나 청아했다고작 이런 노래방 반주에 노래를 저리 고퀄로 불러대다니전에 스쳐가듯 노래를 들은 적이 있는 것 같은데그때와는 감상이 전혀 달랐다.

 

힘든 노래를 부른 것도 아니었는데 무대를 내려온 슬기의 뺨이 빨갰다원래 이런 거 부끄러워하는 타입인가근데 그냥 흥에 들뜨면 잘 노는 앤 것 같기도 하고주현은 손부채질을 하며 열을 식히는 슬기를 망연히 들여다봤다덥다숨을 늘어뜨린 슬기가 자리 앞에 놓인 잔을 벌컥벌컥 들이켰다저거말릴 틈도 없이 잔을 원샷한 슬기가 돌연 연달아 헛기침을 했다주현은 뜨악한 채로 입을 벌렸다애꿎게 북북 뜯어내고 있던 상추에서 물이 떨어졌다.

 

어떡해그거 물 아니고 소준데.”

어으너무 맛없어……

괜찮아요?”

 

주현이 묻는 동시에 테이블로 남자 무리들이 들이닥쳤다이름은 대충 알고 있었는데 이렇게 귀엽게 생긴지는 오늘 처음 알았다소문 자자했던 노래 특출나게 잘하는 신입생이 너였냐대부분 재미없고 쓸모도 없는 얘기들이었다사람들은 물고 흔들 타겟을 정하자 금방 테이블을 바꿨다주현은 뒷 테이블로 쉽게 밀려났다호기심 많은 남자들은 슬기에게 넌지시 술을 권했다안 먹겠다고 사양하는 것도 둘러싸인 자리에서는 눈치껏이었다몇 차례 거절을 했지만 유효가 길게 가지는 못했다.

 

슬기는 결국 능글맞은 선배들이 주는 술을 족족 다 받아마시고 있었다게임과 더불어 대여섯 번 폭탄주가 돌고 나자 슬기의 얼굴은 금세 터질 듯이 벌게졌다주현은 뒤편에서 그 과정들을 멀뚱히 지켜보고만 있었다어차피 끼어봤자 목소리를 내지도 못할 거였다쟤 진짜 괜찮으려나저러다 토할 텐데이젠 아예 의식도 없이 물처럼 맥주를 쏟아부을 때였다말리려던 참에 슬기가 화장실을 갔다 오겠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주현은 괜히 속이 답답하단 핑계로 콘도를 빠져나왔다곧장 숙소 화장실로 올라가진 않았을 텐데주현은 이유도 없이 슬기를 찾아 바깥 구석구석을 헤맸다우거진 풀숲 근처에 발을 딛자 어디선가 웩웩대는 소리가 들렸다그럼 그렇지외진 공용 화장실에 주저앉아 슬기는 끝도 없이 먹은 걸 게워내는 중이었다여긴 또 어떻게 찾아내서그 와중에 그런 게 퍽이나 웃겼다비위가 약함에도 불구하고 주현은 말없이 슬기의 등을 두드렸다아는 게 아무것도 없는 사람한테 살면서 내본 최선의 배려였다몸도 못 가눈 채로 연신 헛구역질이었다그러니까 작작들 좀 먹이고 작작 좀 받아마시지애 하나 골탕 먹이는 걸 낙으로 삼는 몹쓸 종자들하긴다시 생각해보면 이런 상태인 게 당연할 만도 했다술잔을 물릴 만한 짬이 있었으면 진작에 쳐냈겠지.

 

괜찮아요많이 마신 것 같은데술 못한다면서요.”

힘들어안 돼자살그냥 죽을래……

죽으면 안 되구더 안 먹을 거죠숙소 들어갈래요?”

네네.”

 

아마 자기가 뭔 대답을 하는지도 제대로 모르는 것 같았다한 손으로는 허리를 붙들고한 손은 어깨에 걸친 채로 주현은 어기적대며 걸었다봄치고는 나름 밤 공기가 서늘했는데도 진이 빠져서 땀이 뻘뻘 났다보기엔 깡 말라 보였는데 주현이 감당하기엔 무거웠다어찌저찌 배정된 숙소에 도착해서도 슬기는 서너번을 더 토했다대놓고 바닥에 쏟아낼 기세라 주현은 구석에 처박힌 쓰레기통까지 끌어와 슬기의 얼굴 앞에 대고 있었다이게 뭔 병수발이야난리도 보통 난리가 아니었다찬찬히 등을 쓸어주자 슬기가 그제야 안정을 찾은 듯이 호흡을 골랐다.

 

언니저 물 좀……

 

역한 기운이 다시 치고 올라오는지 말투가 더뎠다알겠어알겠어좀만 기다려진짜 조금만주현은 헐레벌떡 제 짐이 있는 방까지 뛰었다몇 명은 신명난 술자리를 더 견딜 수 없었는지 푹 곯아떨어진 채였다주현은 어쩔 수 없이 가방을 통째로 갖고 왔다전혀 낯선 방이었다누가 함께 자는지도 몰랐다알게 뭐야어차피 술에 쩔면 정신 빠져서 끝물엔 아무렇게나 섞여자게 되어 있었다물을 내밀자 갈증이 났는지 슬기는 허겁지겁 한 병을 다 비워냈다.

 

감사,”

 

말을 끝마치지 못하고 슬기는 다시금 화장실로 뛰쳐나갔다속이 제대로 돌아갈 리가 없었다내일 완전 고생할 텐데주현은 걱정스러운 눈길로 화장실에 퍼져 앉은 슬기의 등을 쓰다듬었다지금쯤 술 먹인 인간들은 애가 어디 갔는지 신경도 안 쓸 텐데쓸데없이 화가 났다영양가도 없고 원인도 불분명한 분노였다.

 

언니…… 죄송한데 저 잘 때까지만 좀 봐주시면 안 돼요?”

알겠어요안 그래도 상태가 이런데 어떻게 두고 가.”

감사합니다제가 지금 속이 너무 안 좋아서.”

 

보일러를 틀어놨는지 바닥이 따끈했다주현은 벽에 힘없이 기댄 슬기를 내려다보며 바닥에 얇은 이불보를 깔았다베개를 놓자 앓는 소리를 낸 슬기가 절로 쓰러지듯 퍼져 누웠다주현은 땀에 절은 앞머리를 넘겨주며 슬기의 이마를 짚었다미약하게 신열이 끓고 있었다몸살 앓는 것도 아니고술 몇 잔 받아 마신 것치고는 대가를 치르는 게 너무 요란했다집에 갈래…… 엄마 보고 싶어… 슬기가 눈을 감고 잠결에 중얼거렸다난데없이 비식 웃음이 터졌다지금 그런 소리가 나오냐고.

 

주현은 앉은 자세로 꾸벅 슬기를 굽어보다 옆자리에 결국 나란히 누웠다고롱대는 숨소리가 짙었다눕자마자 급격히 졸음이 몰려왔다다 꺼진 얼굴을 바라보는데 이상하게 속이 뻐근했다처음 봤을 때부터 생각했던 거지만 좀 귀엽게 생기긴 했다진짜로주현은 슬기의 허리에 손을 얹은 채로 스르르 잠들었다시야에 흐릿하게 잡히던 눈꼬리가 완전히 닫혔다그닥 친화력이 좋은 성격은 아니지만 슬기와는 애를 써 친해지고 싶었다오늘은 왠지 단 꿈을 꿀 것 같았다예감이 그랬다.

 

 

 

 

 

 

 

 

 

 

 

 

 

 

 

수영은 연애박사였다물론 이론에 국한된 거였다남한테 이래저래 훈수는 잘 두는데 자기는 연애를 할 때마다 번번이 먼저 차였다아는 게 그렇게 많은데 지 매듭은 못 짓는다니그것도 재주라면 재주였다.

 

입학한 지 막 3주가 넘어가고 있었다대학교가 갈라진 수영과 오랜만에 만난 참이었다삼겹살집에서 소주 한 잔을 일곱 번쯤 꺾어마시며 슬기는 머리를 흩트렸다자고로 수영이 고등학교 내내 슬기에게 해준 충고는 단 하나였다아무 사람이나 쉽게 믿지 마물론 나도슬기는 요즘 주현과 대면할 때마다 불쑥불쑥 그 문장을 떠올렸다.

 

자꾸 얼굴 볼 때마다 예쁘다고귀엽다고 막 그래.”

오호.”

먹을 것도 퍼주고 전공 모르는 것도 수시로 도와주고.”

.”

새벽에 가끔 연락 오긴 하는데 그냥 시답잖은 거야이거 노래 좋으니까 들어봐라뭐 이런 거.”

 

화제가 돌고 돌다 이상한 쪽으로 빠졌다술이 몇 잔 돌고 나니 분위기가 묘해졌다. MT를 갔다 온 뒤로 슬기는 주현과 금방 친해졌다술을 진탕 마신 것까진 기억이 나는데 그 후는 필름이 끊긴 것처럼 암전이었다덕분에 슬기는 다음날 한치의 부끄러움 없이 해장국을 퍼먹었다주현이 자연스레 식판을 들고 제 옆자리에 앉아 제가 했던 진상 짓을 줄줄 읊기 전까지그 후의 일상은…… 말로 설명하기엔 좀 애매했다매일 넘칠 것 같은 주현의 다정함에 벅차하고별것 아닌 한 마디에 기뻤다가 슬펐다가지난 지 며칠이 됐는데도 주현은 가끔씩 제 뒤처리를 해준 건을 들먹이며 슬기를 멋대로 놀려 먹었다주변에선 괜히 속상하지 않냐고 되물었지만 아무 반박도 없이 멍청하게 응해주는 건 주현에게 호감이 있어서였다잘해보고 싶은 건가그 언니랑대체 뭘?

 

그래서너한테 사귀재?”

아니그냥 습관처럼 예뻐해주고 밥 사주고 커피 사주고 주말엔 둘이 가끔 놀고그게 단데?”

볼 때마다 귀여워 죽겠다면서 사귀자곤 안 한다고?”

자주 그런 말 하긴 하는데 꼭… 그래야 되나?”

대놓고 꼬시는데 다른 언질이 없는 거면 그냥 수작 부리는 거지.”

수작?”

 

슬기는 끝이 살짝 탄 고기를 입에 넣고 질겅질겅 씹었다슬기는 퍼뜩 주현의 말간 얼굴을 떠올렸다그 언니가 나한테수작이라니주현과 영 매치가 안 되는 단어라 웃음부터 났다.

 

웃지 말고 내 말 새겨들어가볍게 작업거는 거네그 오빠 그냥 너랑 한 번 자보려고 수작 부리는 거야.”

오빠?”

?”

오빠 아닌데?”

?”

 

수영이 들이키려던 술잔을 테이블에 놓았다그럼연하야근데 니 과에 너보다 어린애 없잖아?

 

언닌데내가 지금까지 말한 거세 살 연상.”

아씨난 또 뭐라고그걸 뭘 그렇게 진지하게 말해완전 말렸잖아.”

 

수영이 시근대며 소주잔을 털어 넣었다표정은 금세 흥미가 쑥 빠져 심드렁했다고작 한 마디 했을 뿐인데 저렇게 금방 말라비틀어진 당근 같을 수가.

 

나 근데 진짜 진지한데.”

너는 큰일이다.”

?”

사람이 의미없이 주는 호의를 너무 크게 해석해서 큰일이야.”

 

수영이 고개를 내젓곤 별것 아니라는 듯이 화두를 넘겼다줄곧 답답했던 감정을 물어볼 사람이 수영뿐이었는데건성인 태도를 보자 착잡해졌다이제 누구한테 상담하지슬기는 소주잔을 가득 채워 원샷했다속이 후끈 달았다수영은 왜 아무것도 아니라고 할까거듭 말하지만 나는 진짜 진지한데……

 

 

 

 

 

 

 

 

 

 

 

 

 

 

 

슬기는 살면서 누군가에게 이토록 맹목적인 애정을 받아본 적이 없었다그래서 그런가다들 이런 거에 익숙할까혹은 주현이 원래 이런 사람인 걸까매번 퍽퍽한 맛인 학식은 매일 먹어도 적응이 안 됐다그래도 그럭저럭 무난은 했다완전 쓰레기는 아니니까 그냥 참고 먹어야지모든 게 덤덤한 와중에도 딱 하나 참아넘길 수 없는 게 있었다바로 맞은편에 앉아서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는 이 시선.

 

맛있어엄청 열심히 먹네.”

 

주현은 눅눅한 돈가스를 욱여넣다 말고 맛이 개차반이라며 수저를 놓은 지 오래였다맛이 있기는 개코가반쯤은 살려고 먹는 거였다배가 고프면 뭘 집중해서 할 수가 없으니까그냥 그래요대충 눈치 보듯 던진 답을 주현은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눈치였다그래너 지금 진짜 맛있게 먹고 있는데.

 

언니 감자튀김도 줄까?”

.”

 

말은 그렇게 해놓고서 주현은 슬기를 뻔히 쳐다만 보고 있었다주변을 잠시 살피다 슬그머니 젓가락으로 감자튀김을 찍었더니 주현이 입을 가리고 소리없이 웃었다눈은 활짝 휘어져서 채 보이지도 않았다뭐지나를 귀여워하나?

 

이것도 맛있어?”

그냥… 그저 그래요.”

 

다 식어빠진 감자튀김은 딱히 맛이랄 게 없었다주현은 이제 아예 테이블에 턱을 괴고 멀뚱한 자세로 슬기를 들여다봤다부담스러운 눈길에 침이 느리게 넘어갔다사람을 뭘 저렇게 보지시선이 너무 그윽해서 발끝이 다 저렸다정말… 밥을 떠먹여달라고 부탁해도 곧장 그러겠다고 할 기세였다.

 

언니저기요.”

말해듣고 있어.”

원래 그렇게 사람을 좀 빤히 보는 편이에요?”

부담스러워?”

아니요뭐 그런 건 아닌데.”

 

어물쩍 입술을 질근거리자 주현을 몸을 배배 꼬며 웃었다.

 

아니야나 사람 원래 빤히 안 봐.”

그러면요?”

뭐가?”

저 정말 뚫어질 것처럼… 보고 있어서.”

너가 되게 빤히 보고 싶은 얼굴인가보지.”

……

 

겉으로 내색은 안 했지만 속으론 괜히 숨이 틀어막혔다빤히 보고 싶은 얼굴세상에 그런 게 어딨는데.

 

너는 원래 그래?”

뭐가요?”

막 사람이 무슨 말만 하면 다 부끄러워하고잘 못 견디고그런 거.”

그런가저 진짜 무덤덤한 편인데.”

 

그래말을 들은 주현이 의외라는 듯이 눈썹을 들썩였다전혀 안 그래 보여덧붙인 말에 노골적인 장난기가 묻어났다.

 

슬기야.”

?”

우리 2주 후에 같이 벚꽃 보러 갈래공원에날도 좋은데.”

저랑요왜요언니 친구들이랑 안 가고요하필 저랑?”

하필 너랑단둘이걔네들이랑은 꽃구경 질리게 했어이제 신선한 사람이랑 해야지언니가 맛있는 것도 사줄게시간 날 때 가자.”

저 그럼민지도 같이 가면 안 돼요벚꽃 보러 가자고 먼저 약속했는데.”

“1시간 전도 아니고바로 방금 전에 내가 너랑만 가고 싶다 그랬는데.”

 

주현이 시무룩한 목소리로 말했다괜히 주눅이 들었다민지랑 따로 약속을 먼저 잡아놓긴 했는데시간이 나는 틈은 정해져 있었고 안 봐도 시기는 겹칠 게 빤했다그 일정을 더 뒤로 미뤄야 하나.

 

난 너랑만 둘이 있는 게 좋거든.”

……

정 그러면 민지랑 먼저 놀다 와난 뒷순서로 빠질게언니 잘 기다려생각보다 인내심이 좀 많아요.”

 

유쾌함이 적절히 섞인 농담조였다주현이 수업이 있어 먼저 가겠다며 식판을 들고 일어섰다찰나였지만 옅게 웃고 있는 주현과 눈이 마주쳤다아까부터 유심히 보고 있었는데 왜 몰랐을까주현은 원하던 뭔가를 얻은 것처럼 만족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슬기는 주현이 빠져나간 학관 식당 뒷문을 한참 바라보다 정면으로 고개를 돌렸다어느새 테이블 위엔 커피 한 잔이 놓여 있었다주현이 주고 간 뇌물일지도 모르는 그것이.

 

 

 

 

 

 

 

 

 

 

 

 

 

 

 

 

 

꽤나 오래 대학생활에 대해 낭만을 가진 적이 있었지만막상 발을 들인 학교엔 별게 없었다대놓고 말하자면 과가 과인만큼 특성상 하루 종일 연습실에서 썩는 게 대부분이었다이미 더 섬세하게 체크할 곳이 없는 악보는 엉망이었다펜으로 이곳저곳을 난도질 해놓은 종이는 끝머리가 벌써 너덜너덜했다오늘도 역시나다 때려치우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이것 말고도 앞으로 남은 과제가 수두룩빽빽한데진짜 이걸 어느 세월에 다 해괜스레 없던 두통마저 생길 판이었다.

 

뭐 해머리는 다 쥐어뜯어놓고.”

 

때마침 연습실의 문이 열렸다빼꼼히 얼굴을 들이민 사람은 주현이었다하얗고 작은 손엔 편의점 로고가 박힌 봉투가 들려 있었다좋겠다언니는 이럴 시간도 있고다른 것보다 그런 영양가 없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너 혼자만 여기 있는 것 같던데애들 다 놀러 나갔나봐연습실 조용하더라.”

과제 준비 다 했나 봐요전 아직 카피도 덜 땄는데.”

봄이라 다들 해이한 거지저러다 나중에 다 망해너는 죽상이네노래가 잘 안 돼?”

늘 그렇죠… 잘 되면 그게 더 이상한 날이라 막 혼자 난리치고 그래요너무 좋아서.”

밖에서 몰래 듣고 있었는데 엄청 잘하던데계속.”

왜 남이 노래하는 거를엿듣고 그러…… 세요.”

엿들은 게 아니구 귀가 있다 보니까 저절로 들리데그리고 연습실에서 너 혼자만 쩌렁쩌렁하다니까.”

 

주현이 봉투를 펼치며 말했다안에는 삼각김밥과 음료수그리고 몇몇 군것질거리들이 들어 있었다슬쩍 눈치를 보더니 주현이 그 봉투를 다시 묶어 슬기에게 통째로 안겼다이게 뭐예요뭐긴 뭐야먹을 거지당연한 질문이 허탈했는지 주현이 눈을 접으며 피실거렸다.

 

아는데요그냥 무슨 뜻으로 주시는 건지

너 먹으라구연습하다 보면 금방 허기지잖아그럴 때 야금야금 까먹으라구.”

근데 연습실 음식물 반입 금진데.”

 

슬기는 멀거니 피아노 위에 붙은 연습실 금지 규칙 종이를 올려다봤다제 성격상 여기서 뭘 먹을 일은 평생 없을 터였다.

 

알아그런 건 좀 유도리 있게 넘어가는 거지.”

냄새 배서 걸리면 저 한 달 동안 연습실 못 쓰는데.”

너는 되게 신기한 데서 곧이곧대로인 면이 있는 거 같아.”

 

주현이 입술을 삐죽거렸다조금은 뾰로통해 보이기도 했다너무 철벽을 쳤나답지 않게 시무룩해 하는 것 같아서 신경이 쓰였다.

 

그럼 우리 나갈래?”

?”

보니까 연습도 잘 안 되는 것 같은데 기분전환 겸그거 나가서 먹자.”

 

주현이 턱짓으로 봉투를 흘깃거렸다저는 근데 아직 연습이 덜…… 생각 없이 놀면 안 된다는 다짐을 하기도 전에 주현에게 팔이 붙들렸다곧장 연습실 문이 열렸고 탁하게 뭉쳐있던 공기가 삽시간 화사해졌다조금 여유롭게 하면 어때주현의 동그란 뒤통수를 보자 불현듯 그런 생각이 들었다난해한 감정에 불쑥 끌려가는 느낌이 나쁘지 않았다.

 

 

 

 

 

 

 

 

 

 

 

 

 

 

 

 

 

 

 

주현은 평소에 먹던 맛없고 퍼석한 학식보다 삼각김밥을 더 맛있게 우적거렸다하긴생긴 대로 주현은 음식을 좀 많이 가리는 편이었다무던하게 뭐든 잘 먹는 저에 비하면 확실히 까다로운 사람이기는 했다그치만 지금까지 적어도 제 앞에서 깨작거리는 모습을 보인 적은 없었다주현은 그게 제 나름의 노력이라고 표현했는데그런 말을 들을 때면 슬기는 되레 갸우뚱해졌다나한테 잘 보이고 싶어서 무지 애쓰고 있다고 했던가무슨 의중으로 그런 말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날씨 엄청 좋지좀 있으면 여기서 꽃 더 활짝 필 거래.”

 

음식을 다 씹어삼킨 주현이 손을 털며 말했다슬기는 군데군데 핀 벚꽃나무를 올려다보며 주현이 준 초콜렛을 한 조각씩 뚝뚝 끊어 느리게 삼켰다음악관 바로 앞엔 긴 벤치 여러 개와 작은 놀이터가 있었다캠퍼스 온 사방에 사람과 더불어 꽃 천지였다바람이 부는 곳마다 달큰한 냄새가 흩어졌다.

 

다른 거 많이 사 왔는데 내내 초콜릿만 먹네너 초콜릿 좋아해?”

.”

 

한적한 놀이터를 둘러보다 말고 주현이 대뜸 간격을 좁혀왔다벤치가 약하게 덜컹거렸다넓게 벌려져있던 거리가 순식간에 가까워졌다슬기는 초콜릿을 꾹 쥐고 우물대던 입을 앙 다물었다이 언니는 원래 이런가…… 막 아무 거리낌 없이 다가오고그러면서도 어색한 티가 하나도 안 나고.

 

너 머리에 꽃잎 붙었어.”

 

주현이 불쑥 제 머리 쪽으로 손을 뻗었다가는 손가락이 제 머리칼을 옅게 쓸고 지나갔다이거 봐봐주현이 천진한 얼굴로 손바닥을 펼쳐 보였다핑크빛보단 덜 진한 벚꽃잎이 놓여 있었다.

 

그거 알아떨어지는 꽃잎 한 번에 잡으면 소원 이뤄진대.”

진짜요저는 다르게 알고 있는데그거 한 번에 잡으면 사랑이 이루어진다고같이 있는 사람이랑 잘 된다는……

 

엉겁결에 튀어나온 말이었다그래너랑 나랑 알고 있는 사실이 다르네주현이 신기하다는 듯이 웃고는 벚꽃잎을 슬기의 자켓 위에 올려놓았다다분히 장난기 어린 얼굴이었다.

 

있잖아요저 궁금한 거 있는데 뭐 하나만 물어봐도 돼요?”

뭔데?”

언니는 저한테 왜 이렇게 잘해줘요?”

 

별 대수롭지 않은 질문이었나주현이 싱겁다는 듯 픽 웃었다.

 

너한테 관심 있어서?”

언제부터요?”

처음부터.”

언제가 처음인지 저는 잘 모르겠는데.”

아니다처음은 아닌가보랏빛 향기 부를 때 예뻐서그거 울 엄마 노래방 18번이거든근데 그냥… 니가 부르니까 느낌이 너무 달라서 좋았어그랬다고.”

 

주현이 어물거리며 말을 흐렸다슬기는 멀거니 주현의 옆모습만 바라봤다뒤로 머리를 넘긴 탓에 새빨갛게 타오른 귀가 잘도 보였다저건…… 지금 부끄러운 건가.

 

우리 좀 더 친해지자.”

……

너 나한테 말도 좀 놓고나 뻥 안 치고 너한테 벌써 30번 넘게 애원했어.”

 

편해지자고…… 단호하던 목소리가 조금씩 사그라졌다주현 본인은 아마 모를 테지만 말꼬리 끝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대답이 없네나 별로 마음에 안 드나 보다주현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투덜거렸다어디에선가 미약한 봄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화창한 날씨따뜻한 햇볕적당히 소란스러운 분위기 같은 것들안 싫은데아니사실은 그런 게 아니라.

 

안 싫어요.”

……

좀 더 친해지면… 친해지고 싶어요.”

 

스스로 듣기에도 퍽 어수룩한 말투였다작게 인상을 찌푸리고 있던 주현이 금세 표정을 펴고 해맑게 웃었다꼭 꽃을 보러 공원까지 가지 않아도 될 텐데그럴 필요가 없어 보였다절경이 굳이 멀리 있는 것도 아니니까슬기는 저를 내려다보는 주현 대신바람에 가늘게 흔들리는 벚꽃나무를 올려다봤다마치 파우더처럼 흩날리는 옅은 꽃잎들싱그럽고 상큼한 향기맑은 하늘사랑에 빠지기엔 더없이 좋은 풍경들이 눈앞에 빼곡했다.

 

 

 

 

 

 

 

 

 

 

 

 

 

 

 

채플을 마치고 막 강의실을 빠져나왔을 때였다주현이 벽에 기대 서 있다 저를 보고 손을 흔들었다언니가 왜 여길슬기가 알고 있는 사실이 맞다면 오늘 주현의 시간표엔 이 수업이 없었다그렇다면 답은 하나였다굳이 나를 보러 여기까지 왔다는 것.

 

웬일이에요?”

웬일은할 말 있어서 왔지너는 꼭 나 볼 때마다 별일 있어야 되는 것처럼 얘기하더라.”

그런 게 아니라

너 아직 점심 안 먹었지언니랑 같이 떡볶이 먹을래?”

떡볶이요사줘요?”

 

농담이랍시고 던진 말에 주현이 푹 웃었다비스듬하게 올려다보는 눈꼬리가 다정했다.

 

사줘그럼 같이 먹어줄래?”

뭐 딱히 얻어먹으려고 한 소리는 아니었는데.”

굳이 얻어먹으려고 수 쓰는 거 난 좋은데다른 애들은 말고너는 괜찮아.”

왜요?”

 

의문이 한 박자 늦게 떨어졌다왜냐고주현이 정말 모르냐는 듯 되물었다.

 

언니 너한테 관심 있다니까.”

……저한테 자꾸 장난치시는 것 같은데.”

장난 아니라니까.”

으음.”

아참근데 떡볶이 먹으면서 그 얘기 하려고 그랬어.”

 

주현이 건물 계단을 잘 내려다가 말고 제자리에 우뚝 멈췄다슬기는 주현의 동그란 정수리를 내려다보며 마른침을 삼켰다주현의 얼굴에 언뜻 긴장이 서려 있었다.

 

너 우리 집에 안 갈래?”

 

 

 

 

 

 

 

 

 

 

 

 

 

 

 

 

 

매운 떡볶이를 감흥 없이 삼키면서 슬기는 테이블 밑으로 열심히 수영에게 카톡을 보냈다어떡해그 언니가 자기 집에 오래어떡해이거 뭔데뭘 거 같아?

 

[뭐긴 뭐야집에 놀러 오라는 거지.]

[아니뭐 있는 거 아니냐고그냥이야?]

[너 머리에 빵꾸 났냐사람 말을 있는 그대로 좀 받아들이고 그래 봐라.]

 

아니진짜로…… 니가 이 말을 눈앞에서 들으면 느낌이 다르다니까슬기는 울먹이며 음료수를 삼켰다혀엔 이미 감각이 없었다그것보다 더 빠르게 머리가 도느라 정신이 없었다.

 

뭐 해친구랑 문자해?”

?”

아니손이 바쁘길래.”

아아친구한테 뭐가 좀 와서잠깐만요.”

 

나 어떡해도와달라고몇 번을 더 징징거리자 수영이 못 이기겠다는 듯 답장을 보내왔다뭘 어떡해정 걸리면 그 언니 집 가지 말고 너네 집에 초대하든가.

 

진짜 이 기집애가……

?”

아니요아니저 언니혹시 언니 집 가는 거 말구 저희 집에 오실래요?”

너희 집에?”

딱히 별건 없는데그냥.”

그래그럼 저녁에 가자.”

설마오늘 저녁에요?”

 

너 오늘 합주 끝나면 늦게 마치잖아나도 과제 다 하면 9시쯤일 걸그때 같이 퇴근하면 되겠네주현이 유쾌한 목소리로 말했다아뿔싸내 계획은 이런 게 아니었는데.

 

오늘은 좀 너무 갑작스러운데.”

집 더러워괜찮아언니도 별로 깨끗하게 안 살거든.”

……그러면괜찮은가저희 집에 가서 뭐 하구 놀아요?”

뭐 하고 노냐고라면 먹자.”

라면이요?”

.”

 

뭐 특별한 거 해야 돼주현이 물었다아니요그런 건 아니죠슬기는 어물쩡거리며 마지막 남은 떡볶이를 잘근잘근 씹어 삼켰다뒤늦게 속에서 매운 불이 올라오고 있었다.

 

 

 

 

 

 

 

 

 

 

 

 

 

 

 

 

저녁 9시쯤이 되자 캠퍼스는 금세 어둑어둑해졌다곳곳 길목에 몇 개의 가로등만이 불을 밝히고 있었다주현은 작업실에서 데모 수정 작업을 마치고 음악관으로 내려오는 길이라고 했다마침내 정문에서 서로 눈이 마주쳤을 때이유도 없이 괜히 웃음이 터졌다왜 이러지얼굴만 봐도 방금 전까지 속에 쌓여있던 응어리가 확 녹는 기분이었다슬기가 웃자 주현이 영문도 모르고 따라 웃었다.

 

합주는잘 끝났어?”

그럭저럭요기타가 페달 엉성하게 쓰고 저는 자꾸 음 나가고 그래서 애들한테 욕 많이 먹었어요.”

그럭저럭 아니고 잘 안 끝났네.”

그냥좀 힘들었어요.”

저녁 라면 가지고 괜찮겠어더 맛있는 거 먹어야 될 것 같은데.”

맞다.”

 

끝나고 우리 집에 가기로 했지그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어느 쪽으로 가야 돼주현이 골목을 두리번거리며 슬기의 어깨를 가볍게 툭툭 쳤다.

 

버스 타야 돼?”

아니요여기서 별로 안 멀어요가까운 데서 자취하거든요이 골목 쭉 걷다가 막창 집 나오면 오른쪽으로 돌면 돼요.”

아아집이랑 학교랑 진짜 가깝네좋겠다지각 잘 안 하겠네?”

지각이요…… 많이 하는데.”

 

대꾸가 우물우물 터져 나왔다보기보다 꿈지럭거리는 타입인가봐주현이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차라리 집이 멀었으면 좋았을 걸몇 발자국 걷지도 않았는데 벌써 원룸촌 골목으로 진입 중이었다아니지내가 괜한 소릴 했나첨부터 아예 언니 집에 가자 그럴 걸그럼 적어도 이것보단 덜 어색했을 텐데.

 

… 들어오세요.”

 

슬기는 느릿하게 삐걱대는 대문을 열어젖혔다주현은 빼꼼 얼굴을 디밀더니 조심스럽게 신발을 벗고 집안으로 발을 들였다그러고 보니 자취를 시작하고 나서 처음이었다누군가를 집에 이렇게 데려와본 건.

 

집에 뭐 먹을 거 있어웬만한 거 없으면 내가 지금 편의점 가서 사 오구.”

왜요라면 먹자고… 했잖아요.”

라면?”

라면 먹자면서요그래서 온 거 아니에요?”

…… 그치맞지라면.”

 

나 여기 앉아도 돼아니다뭐 도와줄까가방도 채 내려놓지 못하고 거실에서 우왕자왕하던 주현이 어수룩한 얼굴로 물었다아니에요됐어요저 라면 완전 맛있게 끓이거든요저 믿고 맡겨보세요다른 건 진짜 못해도 라면은 일류 셰프처럼 끓일 수 있어요혼자 주절대는 말에 주현이 못 말린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슬기는 한숨을 내쉬다 기름칠이 덜 된 고물처럼 뻑뻑한 손길로 찬장을 열었다마땅히 대접할 게 없다는 건 알고 있었는데 식량자체가 진짜 빈약하긴 했다어쩌지주현이 이런 걸 좋아하려나라면 메뉴 하나도 도통 자신이 없었다.

 

육개장 칼국수 괜찮아요언니?”

나 다 잘 먹어면 킬러라.”

진짜요면이면 다 좋아해요?”

나 그런 종류는 안 가리고 다 잘 먹어그러니까 해주는 대로 감사하게 받아먹을게.”

 

주현은 됐다는 말 한 마디에 정말 얌전한 고양이처럼 거실 테이블 앞에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집안 풍경은 그닥 둘러볼 게 없는 탓인지 시선이 슬기의 뒤통수에만 꽂혀 있었다웬만하면 핸드폰으로 게임이라도 하고 있지아니면 차라리 나한테 말을 걸던가.

 

사실 오는 길에 술 사 오려고 했는데.”

?”

 

적막한 공기를 뚫고 주현이 뜬금없이 말했다.

 

근처에 편의점이 어딨는지 몰라서안 보여가지구.”

아아술은 왜요저 술 못하는 거 알잖아요.”

그냥내가 마시고 싶어서.”

 

주현이 여상한 투와 함께 어깨를 으쓱였다능청스럽고 자연스러운 말인데 괜히 엄한 쪽으로 해석이 됐다술을 왜 하필 우리 집에서 마시겠다고.

 

집에 잔뜩 맛있는 냄새난다.”

라면 다 됐어요잠깐만요.”

 

슬기는 장갑을 낀 한 손으로는 뜨거운 냄비를한 손으로는 그릇 두 개를 쥔 채 거실로 걸어왔다주현은 뚜껑을 열더니 오버스러울 정도로 감탄을 했다그래봐야 고작 라면인데도.

 

잘 먹겠습니다진짜 맛있겠다.”

 

주현이 명랑한 음조로 말하고는 급히 젓가락을 들었다천천히… 드세요슬기는 그 맞은편에 앉아 눈치를 보며 입술을 축였다.

 

너 라면 완전 잘 끓인다장사해도 되겠어.”

맛있어요?”

나 태어나서 이렇게 맛있는 라면 처음 먹어봐.”

 

분명 그저 그런 예의상의 빈말일 뿐이겠지만 괜스레 기분이 들떴다어쨌든 먹는 사람이 맛있다니 다행이었다주현은 칼칼한 국물을 몇 번 떠먹더니 그 뒤로 말없이 꼬들꼬들한 면만 씹어 삼켰다슬기는 슬쩍 눈을 들어 작게 움직이는 턱을 멀거니 바라봤다.

 

나 이거 먹고 좀 더 놀다 가도 돼?”

?”

자고 가는 건 안 되나.”

 

주현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말을 듣자마자 표정이 순식간에 싹 굳었다미안농담이야시선이 마주친 주현이 곧장 손사래를 치며 어색하게 웃었다슬기는 한편으론 이해가 안 됐다아니저 언니는 어떻게 매번 농담이 저런 식이지?

 

저기 미안한데혹시 집에 밥 좀 있어?”

없어요.”

그래.”

다 먹었으면 이만 치울까요언니도 이제 그만 가야 되지 않아요벌써 10시 넘었는데버스 타려면 지금쯤 나가야죠.”

좀 더 있다 가도 되는데. 10시 반 넘어서도 차 있어많아.”

 

주현이 허둥거리며 목덜미를 문질렀다맵고 뜨거운 걸 먹은 탓인지 입술과 뺨이 빨갰다꼭 동네라도 한 바퀴 뛴 사람처럼어쩌지귀엽다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튀어 오르자 금세 맥박이 빠르게 뛰었다눈꺼풀을 느리게 깜빡이다 뭔가 더 할 말이 남은 듯한 주현과 눈이 마주쳤다이유도 근거도 몰랐지만 덜컥 무서워졌다뭘까심장이 왜 이렇게 빨리 뛰는 거지이 언니 얼굴이 너무 잘나서 그런가그래아마 그럴지도 모른다.

 

저기 라면 다 먹었는데 이만 가시는 게 낫지 않을… 좋을 것 같기도……

 

더듬더듬 내뱉자 주현이 애매한 표정으로 가방을 끌어멨다.

 

근데 이 타이밍에 진짜 좀 이상한 소리라서 미안한데너 나 초대해서 정말 라면만 먹이고 보낼 거였어?”

?”

아니야미안아무 소리도 아니야잊어버려그냥.”

 

내가 착각했나주현이 미간을 좁히고 시무룩하게 웅얼댔다집 근처 바로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에 버스정류장이 있었다버스 타는 데까지 배웅해줄까요선심 쓰듯 물었더니 주현은 되레 혼자 알아서 잘 갈 수 있다며 슬기의 호의를 단호하게 튕겨냈다내가 뭘 또 잘못했나천연덕스럽게 다가오는 건 잘하면서 주현은 의외로 제 생각이나 감정 같은 건 잘 표현하지 않았다슬기는 이래서 주현이 어려웠다기복이 쉽게 변하는데 대놓고 알려주는 편은 아니라서.

 

다음에 또 라면 먹으러 와요다음엔 언니가 좋아하는 걸로 제대로 골라서 끓여줄게요.”

나 간다문 잘 닫고 조심해서 자내일 학교에서 봐.”

.”

그리고,”

?”

 

둘은 반쯤 열린 현관문 앞에 마주 선 채 서로를 빤히 바라봤다왜 이렇게 뒷목이 뜨겁지별로 덥지도 않은데부는 바람은 오히려 선선하고 산뜻하기까지 했다.

 

말 좀 놓으라구.”

……

더 편해지자아니지금도 충분히 편한데그게 아니라 더 가까워지자고.”

……

나는 너 되게 좋아하거든나 그렇게 어려워하지 말라고무슨 얘긴지… 알지?”

 

슬기는 잠깐의 텀을 두고 대답했다정확히 무슨 얘긴지 알아듣진 못했지만아무튼 지금보다 더 가까운 사이가 됐으면 좋겠다는 거 아닌가나 그럼 진짜 간다내일 봐주현이 머쓱한 듯 콧등을 긁다 천천히 돌아섰다체격이 왜소한 건 알고 있었는데 어둠에 희미하게 파묻혀선지 평소보다 어깨가 더 작아 보였다어떡하지슬기는 주먹을 꽉 쥔 채로 주현의 뒷모습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제자리에 우두망찰 서 있었다그렇지 않으면 훅 무너질까봐 혹은 주현의 등을 껴안게될까봐 두려웠다.

 

 

 

 

 

 

 

 

 

 

 

 

 

 

금요일 아침이었다일어나자마자 주현에게 카톡이 와 있었다꽤 이른 새벽에 보낸 메시지였다.

 

[당연히 자겠지우리 오늘 학교 하루 째고 벚꽃 보러 놀러 갈래언니가 맛있는 거 사줄게싫으면 거절해도 되고보면 꼭 답 좀.]

 

싫으면 거절해도 되고유난히 아무렇지도 않게 섞여있는 그 문장이 마음에 걸렸다꼭 거절하지 말라는 것처럼 보내놓고서는슬기는 몇 번 더 메시지를 들여다보다 주현에게 답장을 보냈다좋다고어디서 몇 시에 만나자는 내용까지 길게 덧붙였다.

 

얘는 누구야?”

 

주현이 슬기 옆에 선 사람을 올려다보며 얼빠진 얼굴로 물었다약속 장소로 지정된 한강 공원은 평일임에도 불구하고 어딜 가나 사람이 많았다쾌청한 날씨 때문이겠지가족과 연인들로 길거리마다 인파가 북적거렸다혹시나 싶어서 데리고 왔어요슬기는 속내를 삼키고 괜스레 유쾌한 목소리로 말했다.

 

친구요고등학교 친구.”

안녕하세요박수영이라고 합니다.”

 

수영이 낯선 기색도 없이 고개를 꾸벅 숙였다주현은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인지 당황한 눈빛으로 어어하고 대꾸했다오늘 너도 학교 하루 째라내가 일당 줄게아님 맛있는 거 사줄 테니까 어쨌든 나와수영은 내가 니 데이트에 왜 끼어야 하냐며 코웃음을 치다 일당을 더 세게 올려준다는 말에 못 이기는 척 승낙을 해왔다.

 

친구랑 셋이 같이 놀아도 되죠?”

어어그럼더 재밌겠네.”

 

주현이 못마땅한 눈길로 수영을 훑었다너 나 잠만 봐죄송한데 잠시만요수영이 주현에게 양해를 구하고 거리를 살짝 띄운 뒤 슬기의 어깨를 돌려세웠다뭐가 쓸데없이 억울한가손아귀에 담긴 힘이 억셌다.

 

.”

?”

뭐야진짜저 언니 연예인이야?”

아니뭔 소리야그냥 학교 선배지.”

 

슬기는 헛소리를 하는 수영을 멀뚱히 올려다봤다진짜 대단하잖아뭐가감흥이 안 와저 언니 얼굴이!

 

…… 저 언니가 너한테 대박 잘해준다고저 얼굴로?”

엄청.”

 

수영이 힐끔 주현을 바라보다 다시 슬기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저런 얼굴로 들이대면 뭐든 오해할 만하겠네.

 

구전 설화 같은 얘기 말고 실제로 주현을 맞닥뜨린 수영의 감상은 그랬다.

 

 

 

 

 

 

 

 

 

 

 

 

 

 

 

 

벚꽃이 한창이었다자전거를 타는 연인들아이와 산책을 나온 엄마나들이를 나온 친구들로 공원이 한껏 붐볐다주현은 쉴 새 없이 수영과 슬기의 손에 먹을 걸 쥐여주더니 수영이 배가 부르다고 할 쯤에야 뇌물공세를 관뒀다핫도그와 햄버거김밥과 치킨까지온갖 기름진 걸 다 욱여넣었더니 아까부터 목이 칼칼했다.

 

둘이 여기서 잠깐만 기다려.”

 

주현이 갑자기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 앉아있던 벤치에서 일어나 어딘가로 급히 달려갔다수영은 화사한 꽃잎이 떨어지는 풍경 아래서 셀카를 찍는 데 여념이 없었다나 너무 예쁘게 나온 것 같지 않아수영이 제 핸드폰 액정을 들이대며 물었다찍힌 사진들은 하나같이 다 미소가 과했다어련하시겠어의미 없이 몇 번 수영의 장단을 맞춰주다 이내 시들해진 참에야 주현이 자리로 돌아왔다작은 두 손엔 하늘색 솜사탕 두 개와 물이 들려 있었다슬기와 수영에게 물과 솜사탕을 건네며 주현이 씩 웃었다군더더기가 없는 미소였다.

 

언니 쟤 거는 예쁜 꽃 모양인데 제 거는 왜 찌그러진 휴지처럼 생겼어요?”

그러네미안급하게 받아오느라 모양 어땠는지 신경 쓸 틈이 없었어.”

강슬기는 그 와중에 멀쩡한 거 받아먹고.”

 

수영이 밉지 않게 투덜거렸다미안지금 가서 다시 예쁜 거 사줘주현이 쩔쩔매며 입술을 씹었다아니에요됐어요그냥 해본 말이지솜사탕을 입에 넣더니 수영은 언제 그랬냐는 듯 금세 천진하게 웃었다단순한 걸로 치자면 얘나 나나 별 할 말이 없었다.

 

솜사탕이요.”

.”

달아요.”

많이 먹어많이 먹을 것도 없지만.”

근데 언니 솜사탕이랑 물은 왜 샀어요?”

 

하릴없이 달기만한 설탕 덩어리를 뜯어 먹다 보니 문득 드는 생각이 그거였다이 언니는 왜 나랑 박수영 시중들 듯이 이렇게 잘해주고 있지자기는 하나도 안 챙기고이리저리 바쁘게 뛰어다니느라 주현의 이마에 미약한 땀이 맺혀 있었다왜 샀는지가 먹다 보니까 뜬금없이 궁금해주현이 어린애를 달래듯 다정한 말투로 물었다나이차로 따져도 고작 세 살 차인데이 언니는 항상 날 다섯 살짜리 취급하듯 대하는 경향이 있다.

 

솜사탕은 너가 좋아할 것 같아서.”

……

물은 너 목 마를까봐.”

 

수영이한테는 비밀이야친구 잘 삐지는 성격 같은데주현이 슬기의 귓가에 대고 조곤조곤 속삭였다둘이 무슨 얘기해요손이 찐득해졌다며 울상을 짓던 수영이 주현과 슬기 사이로 불쑥 고개를 들이밀었다화장실 가자고슬기도 손 씻고 싶대주현이 능청스럽게 말했다수상해수영이 가는 눈을 뜨고 슬기와 주현을 번갈아 흘겨봤다둘이 수상해수상하다고그 말만을 중얼거리면서.

 

 

 

 

 

 

 

 

 

 

 

 

 

 

 

여러 가지를 둘러보고 이것저것 얘기를 나눈 것뿐인데 어느새 저녁이었다이대로 헤어지기는 아쉽다고 수영이 칭얼거렸다그때였다자기가 잘 아는 삼겹살집이 있다며 주현이 나서서 고기와 술을 사겠다고 했다오늘 하루 종일 얻어먹는 것 같은데슬기가 무안하게 중얼거리는 틈에 수영이 감사합니다하고 선뜻 허리를 굽혔다뭐 어때이 정도 호의는 받아도 괜찮겠지주현의 웃는 얼굴 때문인지 마음에 나돌던 걱정도 금세 접혔다.

 

천천히 꼭꼭 씹어서 먹어.”

 

주현이 자상한 목소리로 말하면서 제 앞에 물잔을 밀어줬다고기가 앞에 있는데 천천히 먹으라고슬기는 잠시 주현의 얘기를 듣다 쌈을 싸는데 집중했다주현은 먹기보단 열심히 고기를 굽는 편이었다덕분에 자리에 멀거니 앉아있던 우리만 편하게 밥을 먹게 됐다이모 여기 참이슬 한 병이요기필코 안 친한 사람과 있는 자리에서 술은 안 마신다더니수영은 고기가 익자마자 대뜸 소주부터 시켰다.

 

안 친한 사람이랑 술은 절대 안 마신다며.”

누가누구랑 누가 안 친하대나 주현 언니랑 친해몇 시간 만에 완전 가까워졌잖어.”

 

술도 안 들이켰으면서 수영은 벌써 취한 태세였다너 술 잘 마셔주현이 힐끗 눈길을 넘기며 수영에게 물었다저 주량 기본이 3병이에요대박이죠수영이 어깨를 들썩이며 유쾌하게 웃었다어디서 저런 뻥카를슬기는 잠자코 입을 다문 채 우적우적 고기를 씹었다말은 저렇게 해도 수영은 한 병 이상 더 들어가면 제정신을 못 차리고 휘청거리는 타입이었다나중에 골골거리면서 집에 데려다 달라고 떼나 안 쓰면 다행이지.

 

쟤는 여기서 집 가까워?”

왜요?”

그냥.”

 

분위기가 제법 무르익고 있을 때였다손으로 연기를 휘젓던 주현이 헛기침을 하며 물었다.

 

그렇게 멀진 않아요… 좀 불편해요이제 집에 보낼까요?”

아니야그런 거 아니구.”

 

주현이 고개를 저었다나 빼고 둘이 무슨 얘기해요같이 술도 안 마셔주고진짜 더럽게 재미없는 사람들이야수영이 잔에 술을 따르며 중얼거렸다쟤는 쉬지도 않고 잘도 마셔댄다술기운이 꽤 오른 것 같은데 그에 비해 헛소리를 많이 하는 편도 아니었다.

 

잠깐만나 화장실 갔다 올게요둘이 고기 먹고 있어 봐요.”

 

꼭 자기가 사는 것처럼 말하네주현이 파채를 씹으며 짓궂게 키득거렸다수영이 테이블 모서리를 짚고선 자리에서 어정쩡하게 일어났다활기가 돌던 눈이 반쯤은 취기에 절어 풀려 있었다.

 

화장실 같이 가줘쟤 상태 안 좋은 것 같은데.”

 

주현이 제 신발로 슬기의 운동화코를 쿡쿡 찌르며 말했다어쩔 수 없지슬기는 쌈을 사던 손길을 멈추고 뒤따라 자리에서 일어났다수영은 비틀거리며 굽은 어깨로 느릿느릿 걷고 있었다문을 열고 화장실 안으로 들어서자 수영은 잠시 비척대더니 세면대 물을 틀어 손을 씻기 시작했다진짜 대박두어 번 눈을 깜빡이던 수영이 난데없이 그렇게 말했다.

 

?”

저 언니 너한테 진짜 잘해준다눈에서 막 당장이라도 하트 나올 것 같던데?”

뭐야너 안 취했어?”

 

아까 전과 달리 말을 뱉어내는 목소리가 또렷했다당연하지나 아직 백 잔도 더 거뜬해걍 연기 좀 한 거지수영이 윙크를 하며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손을 털어냈다.

 

염치로 보아 중간에 분명 빠졌어야 되는데 타이밍을 잘 못 잡아가지구.”

뭔 소리야?”

너 예전에 나한테 진지하게 고민 상담한 적 있지저 언니 너한테 수작 부리는 거 맞어.”

뜬금없이.”

안 뜬금없어앞길 술술 풀리고 싶으면 내 말 잘 들어봐봐.”

.”

 

수영의 목소리가 점점 작게 잦아들었다아예 속삭이는 수준이었다또 뭔 소릴 하려고그런 마음이었으나 슬기는 아닌 척 수영의 어깨 너머로 가까이 다가섰다수영의 얼굴은 평소와 다르게 중대하고 비장해 보였다.

 

자빠뜨려.”

?”

자빠뜨리라고저 언니용기 있게패기 있게.”

무슨……

내 말 명심해잘해주는 지금이 타이밍 적기야자빠트리는 게 무서우면 타이밍 봐서 잘 자빠져줘용기 있게패기 있게.”

너는 지 앞가림은 제대로 못하면서 맨날 훈수만 잘 둬?”

그러니까그게 뭔 소리겠어내가 천재라는 거지.”

 

한바탕 호쾌하게 웃음을 터뜨린 수영이 슬기의 등을 떠밀었다좁은 화장실 구석구석이 큰 목청 때문에 쩌렁쩌렁 울렸다정신줄 잡고 제대로 뭐 좀 해봐실실거린 수영이 덧붙였다난 술 때문에 먼저 쩔어서 집에 간다 그럴 테니까.

 

.”

.”

근데 내가 먼저 티 나게 들이대면 이상하게 볼까?”

 

한참 묵고 묵힌 뒤에야 불현듯 튀어나온 속내였다웃기는 소리수영이 무슨 말이냐는 듯 눈매를 흘겼다.

 

이상하게 보긴좋아하지.”

진짜?”

저 언니랑 잘해보고 싶어?”

솔직하게 말해?”

.”

예쁨 받고 싶은데.”

 

사레가 들린 듯 수영이 연달아 헛기침을 했다어이없는 한편 신기하다는 눈빛이었다강슬기너 어쩌다 저 언니한테 이렇게 꼬인 거야?

 

나 알아서 먼저 잘 간다고 할 테니까 너 집에 데려다 달라 그래.”

데려다 달라고 하라고무슨 염치로저 언니도 밤길 무서울 텐데.”

얘는 진짜… 그니까그게 작업이라는 거예요.”

나 집에 혼자 잘 갈 수 있는데.”

……니가 이래서 안 되는 거야.”

 

수영이 답답하다는 듯이 슬기의 어깻죽지를 퍽퍽 내리쳤다아파아까 내가 한 얘기 뭘로 들었어귀로 들은 거 아니고 발바닥으로 들었지참나 내가 못 살아다시 들어봐봐내가 계획을 짜줄 테니까 이 코스로 가보라고수영이 애교에도 단계가 있다며 나름 논리적인 전개로 설명을 펼치기 시작했다슬기는 멍하니 설교를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러니까 말이야중요한 건 타이밍이라는 거지잘 자빠뜨리거나잘 자빠져주거나.

 

 

 

 

 

 

 

 

 

 

 

 

 

 

화장실에서 혼자 돌아오자 주현은 다소 의아해했다수영이는 어디 갔어걔 술 먹고 속이 너무 안 좋아서 집에 먼저 간대요혼자 보냈어잘 갈 수 있다 그래서걱정 말래요슬기는 소질도 없는 거짓말을 어영부영 늘어놓으며 의자를 끌어앉았다주현은 잠시 걱정스러운 얼굴을 하는 것 말고는 큰 코멘트가 없었다아니사실 어쩌면 수영이 더 일찍 집으로 돌아가길 바랐을지도 모른다.

 

자리에 앉아 핸드폰을 몇 번 넘겨보던 주현이 슬기를 빤히 쳐다봤다.??우리도 이만 집에 갈까다정하고 부드러운 목소리였다수영과 맞춰주느라 같이 술을 몇 잔 마셨는데도 주현은 애초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멀끔한 얼굴이었다슬기는 당연스럽게 빌지를 들고 카운터 쪽으로 향하는 주현의 뒷모습을 멀뚱히 바라봤다저 언니는 원래 술이 센 건가저번 MT땐 그나마 얼굴이라도 좀 빨개지는 것 같더니.

 

안 가?”

 

가게 문 앞에 선 주현이 눈짓을 하며 물었다가야죠얼빠진 모양새로 의자에 앉아있다가 슬기는 곧바로 짐을 챙겼다핸드폰을 넘겨봤더니 벌써 10시가 넘어 있었다우연처럼 매번 이런 식이었다우습게도 애매하고 아슬한 시간대에 늘 자리가 파투 났다.

 

있잖아.”

?”

나 집에 좀 데려다주면 안 돼?”

 

주현이 웃으며 몸을 치대왔다자연스럽게 팔짱을 끼고 슬기의 허리에 바짝 붙은 채로 주현은 느릿느릿 길을 걸었다절로 숨이 조였다좀 떨어지라고 말하기도 어색한 타이밍이었다이 언니는 왜 갑자기 안 하던 짓을……

 

여기서 몇 번 타면 돼요?”

“603.”

집까지 가려면 멀어요?”

아니한 다섯… 아니다일곱 정거장인가.”

머네요안 멀긴.”

 

버스정류장은 가게에서 퍽 가까웠다주현은 도착하자마자 의자에 앉아 슬기의 손등을 붙들고 흥이 난 듯 발을 굴려댔다그래도 기분이 좋아 보이니까 다행인가슬기는 숨을 참아가며 여유로운 척 주변 풍경을 둘러봤다곳곳에 불이 켜진 가로등과 바쁘게 달리는 자동차들과 색이 예쁜 꽃나무들이 보였다특별히 향수를 뿌린 것도 아닌데 공기 중엔 온통 산뜻한 향들이 가득했다봄이 완연하다는 증거일 터였다.

 

언니저기 버스 왔는데……

저거 하나 보내고 다음 거 타자조금만 이렇게 있으면 안 돼?”

 

몇 분쯤 지났을까눈앞에 603번 버스가 정차했다많은 사람들이 타고 또 많은 사람들이 내렸다시간은 묵묵히 흐르고 있었다주현은 말없이 눈만 굴리고 있더니 나중엔 뭐가 신나는지 허밍까지 흥얼거렸다슬기는 마른침을 삼키다 바닥을 긁어대고 있는 주현의 운동화를 내려다봤다혼자만 이렇게 초조한 것 같았다주현은 당연히 지금 아무 생각이 없을 텐데.

 

언니저기.”

슬기야나 졸려좀만 있다 가자나 몸에 지금 힘도 없구.”

 

주현이 어린 목소리로 칭얼거렸다주변 사람들이 흘깃흘깃 둘을 쳐다보다 이내 지나쳐갔다정류장은 주변은 금세 한적해졌다곳 버스가 끊길 시간이었고 모두가 바빠 보였다당연했다전부 돌아갈 곳이 있으니까슬기는 천천히 초를 세다 이윽고 주현을 따라 눈을 감았다억지로 여유로울 필요는 없지만 그렇다고 괜히 급해질 필요도 없었다슬쩍 휴대폰을 열었더니 시간이 때마침 11시 정각으로 바뀌었다타이밍 좋게 다시 603번 버스가 눈앞에 정차했다.

 

저거 막찬데.”

오늘 집에 안 갈 거예요?”

가야지가자일어나.”

?”

 

자리에서 일어나는 속도에 맞춰 603번 버스가 저만치 멀어졌다떠나가는 버스의 뒤꽁무니를 바라보며 슬기는 눈매를 가늘게 치켜떴다주현이 저를 귀엽다는 듯 지그시 올려다보고 있었다.

 

왜요얼굴이 이상해……

너 귀여워가지구.”

 

또다저런 식의 가벼운 농담슬기로서는 주현이 도무지 무슨 속내를 품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언니 집 여기서 한 5분만 걸으면 돼가자.”

?”

둘이 오붓한 시간 보내려고 수 좀 썼는데예상외로 너무 잘 먹히네그 짧은 새에 긴장도 엄청 하시고.”

 

주현이 놀리듯 고개를 까딱이며 슬기에게 손을 뻗었다데려다 달라고 부탁을 했으니 어쩔 수 없었다슬기는 못 이기는 척 주현의 손을 맞잡고 땅에 시선을 꽂은 채 걸었다속았어사람 놀려 먹는데 완전 도가 텄다주현이 손을 깍지로 바꿔 끼우고는 소리 없이 웃었다속수무책으로 말려드는 기분이었지만 왠지 나쁘지 않았다슬기는 주현의 집 방향으로 걸어가면서 수영이 일러준 충고 하나만을 생각했다적극적이어야 돼니가 먼저 다가가봐그 언니 꿍꿍이 알아낼려면 이 방법이 최고라니까.

 

 

 

 

 

 

 

 

 

 

 

 

 

 

 

주현의 집으로 향하는 길목 근처에 편의점이 하나 있었다슬기는 잠시 고민하다 주현에게 살 게 있으니 밖에서 기다려달라고 말했다뭐 사는데 바깥에서 기다리래주현이 볼을 부풀린 채 고개를 갸우뚱 꺾었다그냥요잠시만요슬기가 편의점에서 물건을 고를 동안 주현은 편의점 유리문을 넘겨다보며 운동화로 바닥을 질질 끌었다얇은 돌들이 채이며 버석버석한 소리가 났다.

 

다 샀어요가요.”

 

편의점 문을 밀고 나온 슬기가 멋쩍은 얼굴로 손을 휘저었다잠시만나도 살 거 있어여기서 잠만 기다려주현은 싱긋 웃으며 편의점 문을 열었다예상치 못한 행동에 당황한 듯 등 뒤에서 슬기의 혼잣말이 들렸다.

 

뭘 샀을까가늠해봤지만 꼽기는 쉽지 않았다주현은 일단 수입맥주 네 캔을 계산하고 잡화 매대를 둘러봤다손에 아무것도 안 들려 있던데뭐 사탕이나 껌 같은 걸 골랐을까이것저것 고심을 하다 불현듯 눈길이 본능처럼 그곳으로 떨어졌다설마이걸 샀을 리가 있나주현은 동이 난 5천 원짜리 콘돔팩을 한참 쳐다보다 카운터로 걸어갔다.

 

죄송한데요.”

?”

아까 방금 물건 사 가신 여자분이요.”

.”

혹시……

?”

 

남자 알바생은 말을 길게 끌자 귀찮아하는 눈치였다아니에요죄송합니다주현은 단도직입적으로 물을까하다 이내 말을 삼켰다이런 발상을 하는 스스로가 우스꽝스러웠다강슬기가 그동안 나한테 얼마나 철벽을 쳐댔는데주현은 연달아 의미없는 사과를 하다가 결국 편의점을 빠져나왔다언니 집 바로 여기예요슬기가 말간 얼굴로 밀집된 자취촌을 가리켰다어어천진한 눈을 보자 괜스레 당혹감이 스몄다가요얼른슬기가 주현의 손을 잡아끌며 어색하게 재촉했다맞잡은 손바닥이 신기할 정도로 뜨거웠다나 이래도 되나주현은 슬기의 동그란 뒤통수를 보며 입 안쪽 살을 짓이겼다머릿속이 이리저리 엉킨 선처럼 복잡했다.

 

 

 

 

 

 

 

 

 

 

 

 

… 들어와.”

 

주현은 현관문을 열며 제가 왜 이렇게 긴장하고 있나를 생각했다평소와 다름없이 매일 생활하던 공간이고 어제와 별 다를 것 없는 그저 그런 풍경이었다기껏 사람 하나를 초대했다고 이렇게 떨 필요가 있을까허나 의문과는 다르게 목울대가 울렁거렸다차라리 우리 집으로 가자는 게 아니라 슬기를 데려다준다고 할 걸 그랬다슬기가 눈치를 살피며 거실 문턱을 밟자마자 주현은 곧바로 후회했다수영과 어쩌다 술도 마셨겠다적당히 취했겠다눈앞엔 귀엽고 천지도 모르는 후배가 있겠다여러모로 위험한 상황이었다.

 

뭐 할래라면 먹을까집에 과자도 있고 음료수도 있는데뭐 먹고 싶은 거 있어뭐 줄까?”

언니.”

?”

 

슬기가 한껏 비장한 얼굴로 운을 뗐다도리어 당황한 건 주현이었다얘는 왜 하필 내 집에서 저런 얼굴이지괜히 정신이 없었다.

 

저 좋아해요?”

?”

……아닌가.”

……

아니면 저 지금 쪽팔려서 여기서 도망가야 되는데.”

 

슬기가 목덜미를 문지르며 천장을 둘러봤다왜 쪽팔린데뒷일이 무서운 게 아니고묻고 싶었으나 입이 붙은 듯 떨어지지 않았다꽉 긴장이 억눌린 분위기는 무거웠다주현은 뒤죽박죽인 생각들을 눌러두고 힐끗 슬기를 훔쳐봤다술도 안 마셔놓곤 콧망울과 귀가 빨갰다뺨엔 연하게 홍조가 올라 있었다.

 

… 취했지?”

 

주현은 조심스레 슬기의 뺨에 손을 갖다 댔다아닌가분명 술은 안 마셨는데내가 모르는 새에 몰래 들이부었나아니면 수영이 애한테 술을 궤짝째로 먹였나방금 날아든 질문이 하도 뜬금없어서 그런 착각까지 들었다.

 

저 편의점에서 이거 샀는데……

 

슬기가 손바닥을 펼쳐보이며 굼뜨게 말했다설마 했는데 진짜 이걸 샀을 줄이야얼마나 꽉 쥐고 있었는지 팩 모서리가 잔뜩 구겨져 있었다왜 샀는데주현은 호흡을 꾹꾹 다스리며 물었다까딱하다간 저도 모르게 엄한 말이 튀어나올 것 같아서였다슬기의 고개가 서서히 으스러지다 팩 꺾였다한참 땅을 보던 슬기가 느리게 말했다.

 

저 언니랑 자고 싶어서……

……

있잖아요저 진짜 궁금한 거 있는데 하나만 물어봐도 돼요?”

뭔데?”

언니는 저 언제부터 좋아했어요?”

 

나름대로 제 선에선 용기를 낸 뻔뻔하고 귀여운 질문이었다주현은 언제부터 빠졌던가를 헤아리다 싱겁게 웃었다지금 이 상황에서 그런 게 무슨 상관이 있다고.

 

너가 MT때 노래 부를 때부터아니다너 막 올리다가 탈진해서 기력 다 떨어져가지고 새근새근 자는데 너무 귀여운 거야그때부터였나.”

대체…… 이유가 뭐 그런

몰라나 그냥 너 처음부터 좋았어귀여워서.”

……뭐야근데 언니는 편의점에서 뭐 샀어요?”

 

이야기를 듣다 아차 싶었는지 그제야 슬기가 궁금한 얼굴로 물었다그게 이 타이밍이 궁금하다니참 답다 싶었다주현은 가방 지퍼를 열고 편의점에서 받은 봉투를 꺼냈다봉투에 든 내용물을 들여다보던 슬기가 입술을 짓씹었다아마 제 생각과는 다른 물건이 든 모양이었다.

 

난 그냥 너랑 같이 술 한 잔 하려고 데려다 달라 애교 좀 부려본 건데.”

……

내가 앞서 나갔는지니가 앞서 나갔는지.”

진짜 박수영……

 

슬기가 자괴감이 든 듯 손바닥으로 얼굴을 감싸 쥐었다아까까지 열만 올라있던 귀는 이제 터질 듯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이왕 이렇게 된 거그럼 어쩔 수 없어요.”

……뭐가?”

저는 버스 끊겼는데.”

 

슬기가 쑥스러운 얼굴로 더듬더듬 말했다얘 봐주현은 속으로만 헛웃음을 들이켰다.

 

택시 타고 가데려다줄게.”

……

농담이야근데 진짜 자고 갈 거야?”

저 그럼 갈까요별 상관은 없는데.”

 

별 상관있어 보이는데슬기가 초조한 듯이 주현을 내려다봤다깜빡대는 눈동자 아래 진득하게 긴장이 덮여 있었다.

 

너 근데 그거 버려그거 구려.”

?”

언니한테 더 좋은 거 있어훨배 비싼 거그거 쓰자.”

……

집에 안 간다며나 안 보낸다진짜로?”

 

무슨 답을 듣기도 전에 주현이 급하게 슬기의 아랫입술을 물었다동시에 슬기의 손에 들린 콘돔 팩을 까득 구겼다역시 뭘 모르는 애답다이런 걸 어떻게 쓰겠다고주현은 얇은 티셔츠를 말아올리며 슬쩍 웃었다하얗고 작은 손이 제 목덜미를 천천히 쓸어내렸다그리 넓지 않은 방의 공기가 슬슬 달구어지고 있었다이제 앞으로 순진하게 어설픈 척은 하지 말아야지슬기는 주현의 어깨를 제 쪽으로 홱 끌어당기며 생각했다이 밤을 다 지새고 나면 내일 집으로 가는 길에 수영에게 메시지를 보내야겠다자빠뜨리기는 무슨그럴 틈도 없었어그리고 말이야나는 얌전히 자빠지는 게 취향이더라하고.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