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린슬] Mellow Tal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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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빈제이
전공 수업을 막 마치고 강의실에서 나오는 길이었다. 슬기는 꾸깃한 악보지를 추리며 어정쩡하게 걸었다. 그때 누군가가 슬그머니 제 팔뚝을 붙들었다.
“뭘 그렇게 집중해?”
“에? 네. 어, 안녕하세요.”
“누가 인사하래? 뭐에 정신 팔렸냐고 물어봤는데.”
주현이 팔을 놓고 짓궂게 웃었다. 실실대는 꼴에 영 착잡해졌다. 슬기는 악보를 대충 반으로 접어 가방 안에 구겨 넣었다. 그걸 본 주현이 실없이 말을 덧붙였다. 악보 소중히 할 줄 모르는 애네. 진짜.
“언니.”
“응?”
“저한테요.”
“응.”
“왜, 왜 이렇게 집적… 거리세요?”
“네?”
큰 농담이라도 들은 것처럼 주현이 깔깔거렸다. 자칫하면 뒤로 푹 넘어갈 기세였다. 웃긴가. 내 말이? 대체 어디가?
“그런 거 아니고. 너 작곡도 해, 요즘?”
“네? 네. 정 교수님한테 기초부터 조금씩 배우고 있는데.”
“오. 앨범 내려고?”
“아니요. 재밌어 보이길래 그냥 호기심으로 하는 거예요.”
“음. 그래? 의외네. 그래도 잘 배워둬. 그거 조금만 다룰 줄 알아도 써먹을 데 되게 많아.”
“네. 근데, 저한테 용건 있는 거 아니었어요?”
아, 참. 주현이 그제야 뭔가 생각난 듯이 주머니를 뒤적였다. 하얗고 작은 손바닥 위에 얹어진 것은 열쇠키였다. 모양이 익숙한.
“정 교수님이 3시에 미디실로 오래. 이제 드럼 막 찍는다며.”
“아……”
“언니 로직 좀 할 줄 알거든? 모르는 거 있음 물어봐. 다 가르쳐줄게.”
“네. 감사해요.”
“감사하긴, 뭘. 좀 이따 앙상블 때 봐.”
주현이 슬기의 손에 키를 쥐여주곤 어깨를 슬쩍 밀었다. 뭘 그렇게 굳어있어. 맨날. 언니 무안하게. 분위기를 풀겠답시고 던진 말에 슬기는 더 짙게 얼었다. 주현은 늘 이런 식이었다. 무게 없고 가벼웠다.
“긴장 풀어.”
“……”
“집적거리는 거 아니구. 전혀.”
우스갯소리라도 들은 듯이 주현이 히죽거렸다. 슬기의 손등을 쿡 찌르곤 주현은 반대편 복도쪽으로 빠르게 멀어졌다. 방금 뭔일이 있었던 거지? 슬기는 제자리에 서서 멀뚱히 눈만 끔뻑였다. 한참 뒤에야 애먼 자각이 들었다.
또 당했다. 배주현 저 능청스러운 인간한테.
「Mellow Talk」
주현이 슬기의 존재를 인식한 것은 MT때 술자리에서였다. 그저 이름과 얼굴을 드문드문 알고 있는 것과 확실하게 인지한다는 건 아무래도 차이가 컸다. 3월 중반의 MT는 의무적으로 치러지는 행사와 같았다. 굳이 천안으로, 그것도 2박 3일씩이나 일정을 잡은 학교 측을 대부분의 무리들은 혐오했다. 대개 놀기 좋아하는 족속들만 모여있는 과인데도 반응이 그저 그랬다. 주현은 버스를 타고 오는 내내 멀미를 했다. 약을 미리 먹었지만 별 효과는 없었다. 방지턱을 넘을 때마다 토기가 쏟아질 것 같았다. 눈을 감고 어서 이 버스에서 내릴 수 있기만을 빌었다.
그나마 위안이 된 건 작년보다 장소가 번듯해졌다는 거였다. 큰 콘도 하나를 통째로 빌렸다고 했다. 이제 수순처럼 먹고 마시고 뻗는 의례가 다겠지. 주현은 아쉽게도 시끌벅적한 분위기를 좋아하지 않았고 술맛도 잘 몰랐다. 어느 자리나 다 그렇듯이 늘상 나서던 인간들만 난리를 쳐댈 게 뻔했다.
도착하자마자 짐을 풀고 옷을 갈아입었다. 과자를 뜯어먹으며 재미도 없는 게임을 하고 선물을 나눠주고. 어째 레퍼토리가 작년이랑 이렇게 똑같을 수가 있지? 차례를 진행하는 MC들의 과장스러운 모션마저도 작년과 똑같았다. 주현을 혀를 차며 콜라를 들이켰다. 아이스박스에 잘 넣어들 왔다더니 어쩐지 밍밍하고 미지근했다.
몇몇은 자처해 바깥에서 고기를 구웠고 대부분은 널찍한 거실에 테이블을 펴놓고 멍하니 앉아 있었다. 몇 년째 졸업을 못해 화석으로 썩어가고 있는 복학생 선배가 마이크에다 대고 호탕한 목소리를 울렸다. 이제 막 자주 보게 될 사이니까 서로 통성명도 하고 좀 친해져. 무슨. 그래봐야 학기가 진행되고 시간이 좀 지나가면 빠질 사람들은 다 알아서 빠져나가기 마련이었다. 누구는 자퇴를 하고, 누구는 편입을 하고, 누구는 아예 과를 바꿔타고.
대개 나이가 많거나 고학번인 선배들은 구석 테이블에 박혀 교수님과 술을 나누거나 끼리끼리 뭉쳐 수다를 떨고 있었다. 주현은 배정된 테이블을 쭉 둘러보며 난데없는 사실을 깨달았다. 옆에 앉은 동기인 윤정과 저를 빼고 나머지는 전부 다 신입생이라는 걸. 야, 우리가 제일 선밴가? 좀 웃기다. 윤정이 술잔에 맥주를 따르며 큭큭거렸다. 어차피 1학년이나 2학년이나 거기서 거기였지만. 마주 앉아있는 얼굴들은 긴장에 바짝 기가 죽은 채였다. 선배 노릇이라 칭하기엔 좀 우스웠다. 주현은 그래도 밥은 편하게 먹을 수 있는 자리가 좋았다. 되도록 분위기를 유하게 풀 필요가 있었다.
다들 나이랑 이름이 어떻게 돼요? 우리 간단하게 통성명 정도는 할까요? 구식적인 멘트를 뱉자마자 한숨이 나왔다. 작년만 해도 딴엔 나름 어렵고 신선한 질문이었는데. 철저하게 그건 받았을 때의 입장이지, 던질 때는 또 달랐다. 죄다 시시했다. 주현은 이래서 의무적인 행사나 술자리들이 싫었다. 애써 진부하고 식상해지는 걸 무릅써야 하니까.
모두들 서툴게 더듬더듬 자기소개를 할 때 유독 주현의 눈에 한 사람이 밟혔다. 그는 분위기나 상황 따위는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이 우적우적 고기만 씹어먹고 있었다. 며칠 굶기라도 한 것처럼 필사적이었다. 욱여넣지 않으면 누가 혼내기라도 하는 것마냥. 참 열심히 먹네. 주현은 대각선에 앉은 사람을 바라보며 저도 모르게 픽 웃었다.
“그쪽은 이름이랑 나이가 어떻게 돼요?”
테이블에 시선을 고정하고 음식만 씹어대던 고개가 그제야 들렸다. 저, 저요? 상황 판단이 느린 모양이었다. 그것도 아니라면 기척을 느끼는 데 둔감하던가.
“저는 스무 살이구요. 강슬기예요. 전공은 보컬……”
야. 여기 그거 모르는 사람 아무도 없어. 그새 친해진 건지 옆자리에 앉은 애가 장난스럽게 슬기를 밀쳤다. 아, 그런가. 듬성한 어조가 테이블을 금세 웃음바다로 만들었다. 아직 미처 벗지 못한 특유의 어리숙함이 있었다. 주현은 그때는 차마 몰랐었다. 그게 열아홉 살 티가 덜 빠진 게 아니라 아예 슬기의 성격이라는 걸.
“그러는 언니… 언니? 그, 몇 살이세요?”
슬기가 젓가락 하나를 입에 물고 맹하게 물었다.
“스물세 살이요. 삼수 했거든요. 그냥 혹시 모를까봐 얘기하는 건데 2학년이에요.”
“아, 네.”
이런 낯간지러운 소개를 또 하고 있다니. 어쩐지 머쓱했다. 주현은 뺨을 긁으며 자리에 앉은 사람들에게 술을 권했다. 빼지 못할 분위기에 거의 곧이곧대로 받아마셨지만 슬기만은 예외였다. 죄송해요. 제가 술을 못해서. 의외로 거절이 단호했다. 할 수 없죠. 저도 억지로는 안 먹여요. 말은 그렇게 했어도 단번에 거부당한 술잔은 조금 무안했다. 주현은 슬기의 옆모습을 힐긋 훔쳐보며 거품이 다 죽은 맥주를 삼켰다. 무진장 쓰고 비렸다.
술이 한창 도는 자리엔 금세 노래판이 벌어졌다. 자기가 잘난 걸 아는 인간들은 취기가 오른 탓인지 죽자고 마이크를 안 놨다. 야, 야! 다른 애들도 놀게 좀 빠져. 학번이 높은 여 선배가 주정 부리듯 흥얼거리는 홍윤의 등짝을 내리쳤다. 1학년 애들 중에 한 곡 할 사람? 도윤이 마이크를 흔들며 싸이키 조명을 켰다. 없어? 콘도엔 이미 취한 사람들 때문에 술 냄새가 가득이었다. 그때였다. 저 한 곡만 해도 돼요? 얌전히 고기만 씹던 슬기가 대뜸 손을 들었다. 두 말 하면 입 아프지. 무대로 나오시죠. 도윤이 능청스러운 톤과 함께 슬기에게 마이크를 넘겼다.
주현은 흐물한 땅콩을 까며 멀거니 번쩍거리는 모니터를 바라봤다. 리모컨을 뚝뚝 눌러대는 슬기의 손가락이 가늘었다. 까맣고 흐린 불빛 안에서도 그런 게 잘만 보였다. 무슨 선곡을 할까 싶은 찰나에 익숙한 멜로디가 울렸다. 몇몇 사람들이 야유와 환호성을 동시에 질러댔다. 반주기에 찍힌 세 자리 숫자가 반짝였다. 정수리 위로 색색깔의 조명이 요란스럽게 떨어졌다. 슬기는 간주에 맞춰 살랑살랑 율동 비슷한 걸 추고 있었다. 그대 모습은 보랏빛처럼 살며시 다가왔지. 예상 밖의 첫 소절에 주현은 눈썹을 푹 꺾었다. 조용하더니 의외로 웃긴 구석이 있네. 바닥에 퍼져 누워있던 남자들이 소리를 지르며 왁자지껄하게 웃었다. 야, 대박 여기 미사리냐? 쟤 몇 년생인데 저런 걸 불러제껴?
마이크를 쥔 채 몸을 까딱대는 모습이 어째 퍼덕거리는 물개 같았다. 귀여워. 존나 재롱떠는 것 같다. 윤정이 보란 듯이 주현의 옆구리를 툭툭 쳤다. 생글생글 웃고 있는 모습은 순진한 걸 넘어 해맑기까지 했다. 뒤에서 가만 구경을 하던 노교수가 취했는지 겉옷 점퍼를 흔들며 목소리를 높였다. 강슬기 완전 하이틴 스타 뺨친다! 진심인지 의무인지 모를 웃음소리가 한꺼번에 뭉쳐 귀를 때렸다. 인간들 하여간에 시끄러워. 주현은 어깨를 움츠리며 단상 위에 올라선 슬기를 빤히 올려다봤다. 목소리가 꽤나 청아했다. 고작 이런 노래방 반주에 노래를 저리 고퀄로 불러대다니. 전에 스쳐가듯 노래를 들은 적이 있는 것 같은데. 그때와는 감상이 전혀 달랐다.
힘든 노래를 부른 것도 아니었는데 무대를 내려온 슬기의 뺨이 빨갰다. 원래 이런 거 부끄러워하는 타입인가. 근데 그냥 흥에 들뜨면 잘 노는 앤 것 같기도 하고. 주현은 손부채질을 하며 열을 식히는 슬기를 망연히 들여다봤다. 덥다. 숨을 늘어뜨린 슬기가 자리 앞에 놓인 잔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아, 저거. 말릴 틈도 없이 잔을 원샷한 슬기가 돌연 연달아 헛기침을 했다. 주현은 뜨악한 채로 입을 벌렸다. 애꿎게 북북 뜯어내고 있던 상추에서 물이 떨어졌다.
“헐. 어떡해. 그거 물 아니고 소준데.”
“어으. 너무 맛없어……”
“괜찮아요?”
주현이 묻는 동시에 테이블로 남자 무리들이 들이닥쳤다. 이름은 대충 알고 있었는데 이렇게 귀엽게 생긴지는 오늘 처음 알았다. 소문 자자했던 노래 특출나게 잘하는 신입생이 너였냐. 대부분 재미없고 쓸모도 없는 얘기들이었다. 사람들은 물고 흔들 타겟을 정하자 금방 테이블을 바꿨다. 주현은 뒷 테이블로 쉽게 밀려났다. 호기심 많은 남자들은 슬기에게 넌지시 술을 권했다. 안 먹겠다고 사양하는 것도 둘러싸인 자리에서는 눈치껏이었다. 몇 차례 거절을 했지만 유효가 길게 가지는 못했다.
슬기는 결국 능글맞은 선배들이 주는 술을 족족 다 받아마시고 있었다. 게임과 더불어 대여섯 번 폭탄주가 돌고 나자 슬기의 얼굴은 금세 터질 듯이 벌게졌다. 주현은 뒤편에서 그 과정들을 멀뚱히 지켜보고만 있었다. 어차피 끼어봤자 목소리를 내지도 못할 거였다. 쟤 진짜 괜찮으려나. 저러다 토할 텐데. 이젠 아예 의식도 없이 물처럼 맥주를 쏟아부을 때였다. 말리려던 참에 슬기가 화장실을 갔다 오겠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주현은 괜히 속이 답답하단 핑계로 콘도를 빠져나왔다. 곧장 숙소 화장실로 올라가진 않았을 텐데. 주현은 이유도 없이 슬기를 찾아 바깥 구석구석을 헤맸다. 우거진 풀숲 근처에 발을 딛자 어디선가 웩웩대는 소리가 들렸다. 그럼 그렇지. 외진 공용 화장실에 주저앉아 슬기는 끝도 없이 먹은 걸 게워내는 중이었다. 여긴 또 어떻게 찾아내서. 그 와중에 그런 게 퍽이나 웃겼다. 비위가 약함에도 불구하고 주현은 말없이 슬기의 등을 두드렸다. 아는 게 아무것도 없는 사람한테 살면서 내본 최선의 배려였다. 몸도 못 가눈 채로 연신 헛구역질이었다. 그러니까 작작들 좀 먹이고 작작 좀 받아마시지. 애 하나 골탕 먹이는 걸 낙으로 삼는 몹쓸 종자들. 하긴. 다시 생각해보면 이런 상태인 게 당연할 만도 했다. 술잔을 물릴 만한 짬이 있었으면 진작에 쳐냈겠지.
“괜찮아요? 많이 마신 것 같은데. 술 못한다면서요.”
“아. 힘들어. 안 돼. 자살. 그냥 죽을래……”
“죽으면 안 되구. 더 안 먹을 거죠? 숙소 들어갈래요?”
“네. 네네.”
아마 자기가 뭔 대답을 하는지도 제대로 모르는 것 같았다. 한 손으로는 허리를 붙들고, 한 손은 어깨에 걸친 채로 주현은 어기적대며 걸었다. 봄치고는 나름 밤 공기가 서늘했는데도 진이 빠져서 땀이 뻘뻘 났다. 보기엔 깡 말라 보였는데 주현이 감당하기엔 무거웠다. 어찌저찌 배정된 숙소에 도착해서도 슬기는 서너번을 더 토했다. 대놓고 바닥에 쏟아낼 기세라 주현은 구석에 처박힌 쓰레기통까지 끌어와 슬기의 얼굴 앞에 대고 있었다. 이게 뭔 병수발이야. 난리도 보통 난리가 아니었다. 찬찬히 등을 쓸어주자 슬기가 그제야 안정을 찾은 듯이 호흡을 골랐다.
“언니, 저 물 좀……”
역한 기운이 다시 치고 올라오는지 말투가 더뎠다. 알겠어, 알겠어. 좀만 기다려. 진짜 조금만. 주현은 헐레벌떡 제 짐이 있는 방까지 뛰었다. 몇 명은 신명난 술자리를 더 견딜 수 없었는지 푹 곯아떨어진 채였다. 주현은 어쩔 수 없이 가방을 통째로 갖고 왔다. 전혀 낯선 방이었다. 누가 함께 자는지도 몰랐다. 알게 뭐야. 어차피 술에 쩔면 정신 빠져서 끝물엔 아무렇게나 섞여자게 되어 있었다. 물을 내밀자 갈증이 났는지 슬기는 허겁지겁 한 병을 다 비워냈다.
“감사,”
말을 끝마치지 못하고 슬기는 다시금 화장실로 뛰쳐나갔다. 속이 제대로 돌아갈 리가 없었다. 내일 완전 고생할 텐데. 주현은 걱정스러운 눈길로 화장실에 퍼져 앉은 슬기의 등을 쓰다듬었다. 지금쯤 술 먹인 인간들은 애가 어디 갔는지 신경도 안 쓸 텐데. 쓸데없이 화가 났다. 영양가도 없고 원인도 불분명한 분노였다.
“언니…… 죄송한데 저 잘 때까지만 좀 봐주시면 안 돼요?”
“어, 알겠어요. 안 그래도 상태가 이런데 어떻게 두고 가.”
“감사합니다. 제가 지금 속이 너무 안 좋아서.”
보일러를 틀어놨는지 바닥이 따끈했다. 주현은 벽에 힘없이 기댄 슬기를 내려다보며 바닥에 얇은 이불보를 깔았다. 베개를 놓자 앓는 소리를 낸 슬기가 절로 쓰러지듯 퍼져 누웠다. 주현은 땀에 절은 앞머리를 넘겨주며 슬기의 이마를 짚었다. 미약하게 신열이 끓고 있었다. 몸살 앓는 것도 아니고. 술 몇 잔 받아 마신 것치고는 대가를 치르는 게 너무 요란했다. 아, 집에 갈래…… 엄마 보고 싶어… 슬기가 눈을 감고 잠결에 중얼거렸다. 난데없이 비식 웃음이 터졌다. 지금 그런 소리가 나오냐고.
주현은 앉은 자세로 꾸벅 슬기를 굽어보다 옆자리에 결국 나란히 누웠다. 고롱대는 숨소리가 짙었다. 눕자마자 급격히 졸음이 몰려왔다. 다 꺼진 얼굴을 바라보는데 이상하게 속이 뻐근했다. 처음 봤을 때부터 생각했던 거지만 좀 귀엽게 생기긴 했다. 진짜로. 주현은 슬기의 허리에 손을 얹은 채로 스르르 잠들었다. 시야에 흐릿하게 잡히던 눈꼬리가 완전히 닫혔다. 그닥 친화력이 좋은 성격은 아니지만 슬기와는 애를 써 친해지고 싶었다. 오늘은 왠지 단 꿈을 꿀 것 같았다. 예감이 그랬다.
수영은 연애박사였다. 물론 이론에 국한된 거였다. 남한테 이래저래 훈수는 잘 두는데 자기는 연애를 할 때마다 번번이 먼저 차였다. 아는 게 그렇게 많은데 지 매듭은 못 짓는다니. 그것도 재주라면 재주였다.
입학한 지 막 3주가 넘어가고 있었다. 대학교가 갈라진 수영과 오랜만에 만난 참이었다. 삼겹살집에서 소주 한 잔을 일곱 번쯤 꺾어마시며 슬기는 머리를 흩트렸다. 자고로 수영이 고등학교 내내 슬기에게 해준 충고는 단 하나였다. 아무 사람이나 쉽게 믿지 마. 물론 나도. 슬기는 요즘 주현과 대면할 때마다 불쑥불쑥 그 문장을 떠올렸다.
“자꾸 얼굴 볼 때마다 예쁘다고, 귀엽다고 막 그래.”
“오호.”
“먹을 것도 퍼주고 전공 모르는 것도 수시로 도와주고.”
“오.”
“새벽에 가끔 연락 오긴 하는데 그냥 시답잖은 거야. 이거 노래 좋으니까 들어봐라, 뭐 이런 거.”
화제가 돌고 돌다 이상한 쪽으로 빠졌다. 술이 몇 잔 돌고 나니 분위기가 묘해졌다. MT를 갔다 온 뒤로 슬기는 주현과 금방 친해졌다. 술을 진탕 마신 것까진 기억이 나는데 그 후는 필름이 끊긴 것처럼 암전이었다. 덕분에 슬기는 다음날 한치의 부끄러움 없이 해장국을 퍼먹었다. 주현이 자연스레 식판을 들고 제 옆자리에 앉아 제가 했던 진상 짓을 줄줄 읊기 전까지. 그 후의 일상은…… 말로 설명하기엔 좀 애매했다. 매일 넘칠 것 같은 주현의 다정함에 벅차하고, 별것 아닌 한 마디에 기뻤다가 슬펐다가. 지난 지 며칠이 됐는데도 주현은 가끔씩 제 뒤처리를 해준 건을 들먹이며 슬기를 멋대로 놀려 먹었다. 주변에선 괜히 속상하지 않냐고 되물었지만 아무 반박도 없이 멍청하게 응해주는 건 주현에게 호감이 있어서였다. 잘해보고 싶은 건가? 그 언니랑? 대체 뭘?
“그래서? 너한테 사귀재?”
“아니. 그냥 습관처럼 예뻐해주고 밥 사주고 커피 사주고 주말엔 둘이 가끔 놀고. 그게 단데?”
“엉? 볼 때마다 귀여워 죽겠다면서 사귀자곤 안 한다고?”
“뭐. 자주 그런 말 하긴 하는데 꼭… 그래야 되나?”
“대놓고 꼬시는데 다른 언질이 없는 거면 그냥 수작 부리는 거지.”
“수작?”
슬기는 끝이 살짝 탄 고기를 입에 넣고 질겅질겅 씹었다. 슬기는 퍼뜩 주현의 말간 얼굴을 떠올렸다. 그 언니가 나한테? 수작이라니. 주현과 영 매치가 안 되는 단어라 웃음부터 났다.
“웃지 말고 내 말 새겨들어. 가볍게 작업거는 거네. 그 오빠 그냥 너랑 한 번 자보려고 수작 부리는 거야.”
“오빠?”
“음?”
“오빠 아닌데?”
“뭐?”
수영이 들이키려던 술잔을 테이블에 놓았다. 그럼? 연하야? 근데 니 과에 너보다 어린애 없잖아?
“언닌데. 내가 지금까지 말한 거. 세 살 연상.”
“아씨. 난 또 뭐라고. 그걸 뭘 그렇게 진지하게 말해. 완전 말렸잖아.”
수영이 시근대며 소주잔을 털어 넣었다. 표정은 금세 흥미가 쑥 빠져 심드렁했다. 고작 한 마디 했을 뿐인데 저렇게 금방 말라비틀어진 당근 같을 수가.
“나 근데 진짜 진지한데.”
“너는 큰일이다.”
“응?”
“사람이 의미없이 주는 호의를 너무 크게 해석해서 큰일이야.”
수영이 고개를 내젓곤 별것 아니라는 듯이 화두를 넘겼다. 줄곧 답답했던 감정을 물어볼 사람이 수영뿐이었는데. 건성인 태도를 보자 착잡해졌다. 이제 누구한테 상담하지. 슬기는 소주잔을 가득 채워 원샷했다. 속이 후끈 달았다. 수영은 왜 아무것도 아니라고 할까. 거듭 말하지만 나는 진짜 진지한데……
슬기는 살면서 누군가에게 이토록 맹목적인 애정을 받아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그런가. 다들 이런 거에 익숙할까. 혹은 주현이 원래 이런 사람인 걸까. 매번 퍽퍽한 맛인 학식은 매일 먹어도 적응이 안 됐다. 그래도 그럭저럭 무난은 했다. 완전 쓰레기는 아니니까 그냥 참고 먹어야지. 모든 게 덤덤한 와중에도 딱 하나 참아넘길 수 없는 게 있었다. 바로 맞은편에 앉아서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는 이 시선.
“맛있어? 엄청 열심히 먹네.”
주현은 눅눅한 돈가스를 욱여넣다 말고 맛이 개차반이라며 수저를 놓은 지 오래였다. 맛이 있기는 개코가. 반쯤은 살려고 먹는 거였다. 배가 고프면 뭘 집중해서 할 수가 없으니까. 그냥 그래요, 맛. 대충 눈치 보듯 던진 답을 주현은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눈치였다. 그래? 너 지금 진짜 맛있게 먹고 있는데.
“언니 감자튀김도 줄까?”
“네.”
말은 그렇게 해놓고서 주현은 슬기를 뻔히 쳐다만 보고 있었다. 주변을 잠시 살피다 슬그머니 젓가락으로 감자튀김을 찍었더니 주현이 입을 가리고 소리없이 웃었다. 눈은 활짝 휘어져서 채 보이지도 않았다. 뭐지. 나를 귀여워하나?
“이것도 맛있어?”
“그냥… 그저 그래요.”
다 식어빠진 감자튀김은 딱히 맛이랄 게 없었다. 주현은 이제 아예 테이블에 턱을 괴고 멀뚱한 자세로 슬기를 들여다봤다. 부담스러운 눈길에 침이 느리게 넘어갔다. 사람을 뭘 저렇게 보지? 시선이 너무 그윽해서 발끝이 다 저렸다. 정말… 밥을 떠먹여달라고 부탁해도 곧장 그러겠다고 할 기세였다.
“언니, 저기요.”
“응. 말해. 듣고 있어.”
“원래 그렇게 사람을 좀 빤히 보는 편이에요?”
“응. 왜? 부담스러워?”
“아니요. 뭐 그런 건 아닌데.”
어물쩍 입술을 질근거리자 주현을 몸을 배배 꼬며 웃었다.
“아니야. 나 사람 원래 빤히 안 봐.”
“그러면요?”
“뭐가?”
“저 정말 뚫어질 것처럼… 보고 있어서.”
“너가 되게 빤히 보고 싶은 얼굴인가보지.”
“……”
겉으로 내색은 안 했지만 속으론 괜히 숨이 틀어막혔다. 빤히 보고 싶은 얼굴? 세상에 그런 게 어딨는데.
“너는 원래 그래?”
“뭐가요?”
“막 사람이 무슨 말만 하면 다 부끄러워하고. 잘 못 견디고. 그런 거.”
“그런가. 저 진짜 무덤덤한 편인데.”
그래? 말을 들은 주현이 의외라는 듯이 눈썹을 들썩였다. 전혀 안 그래 보여. 덧붙인 말에 노골적인 장난기가 묻어났다.
“슬기야.”
“네?”
“우리 2주 후에 같이 벚꽃 보러 갈래? 공원에. 날도 좋은데.”
“…저랑요? 왜요? 언니 친구들이랑 안 가고요? 하필 저랑?”
“응. 하필 너랑. 단둘이. 걔네들이랑은 꽃구경 질리게 했어. 이제 신선한 사람이랑 해야지. 언니가 맛있는 것도 사줄게. 시간 날 때 가자.”
“저 그럼, 민지도 같이 가면 안 돼요? 벚꽃 보러 가자고 먼저 약속했는데.”
“1시간 전도 아니고, 바로 방금 전에 내가 너랑만 가고 싶다 그랬는데.”
주현이 시무룩한 목소리로 말했다. 괜히 주눅이 들었다. 민지랑 따로 약속을 먼저 잡아놓긴 했는데. 시간이 나는 틈은 정해져 있었고 안 봐도 시기는 겹칠 게 빤했다. 그 일정을 더 뒤로 미뤄야 하나.
“난 너랑만 둘이 있는 게 좋거든.”
“……”
“정 그러면 민지랑 먼저 놀다 와. 난 뒷순서로 빠질게. 언니 잘 기다려. 생각보다 인내심이 좀 많아요.”
유쾌함이 적절히 섞인 농담조였다. 주현이 수업이 있어 먼저 가겠다며 식판을 들고 일어섰다. 찰나였지만 옅게 웃고 있는 주현과 눈이 마주쳤다. 아까부터 유심히 보고 있었는데 왜 몰랐을까. 주현은 원하던 뭔가를 얻은 것처럼 만족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슬기는 주현이 빠져나간 학관 식당 뒷문을 한참 바라보다 정면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테이블 위엔 커피 한 잔이 놓여 있었다. 주현이 주고 간 뇌물일지도 모르는 그것이.
꽤나 오래 대학생활에 대해 낭만을 가진 적이 있었지만, 막상 발을 들인 학교엔 별게 없었다. 대놓고 말하자면 과가 과인만큼 특성상 하루 종일 연습실에서 썩는 게 대부분이었다. 이미 더 섬세하게 체크할 곳이 없는 악보는 엉망이었다. 펜으로 이곳저곳을 난도질 해놓은 종이는 끝머리가 벌써 너덜너덜했다. 아, 오늘도 역시나. 다 때려치우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이것 말고도 앞으로 남은 과제가 수두룩빽빽한데. 진짜 이걸 어느 세월에 다 해. 괜스레 없던 두통마저 생길 판이었다.
“뭐 해? 머리는 다 쥐어뜯어놓고.”
때마침 연습실의 문이 열렸다. 빼꼼히 얼굴을 들이민 사람은 주현이었다. 하얗고 작은 손엔 편의점 로고가 박힌 봉투가 들려 있었다. 좋겠다. 언니는 이럴 시간도 있고. 다른 것보다 그런 영양가 없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너 혼자만 여기 있는 것 같던데. 애들 다 놀러 나갔나봐. 연습실 조용하더라.”
“과제 준비 다 했나 봐요. 전 아직 카피도 덜 땄는데.”
“봄이라 다들 해이한 거지. 저러다 나중에 다 망해. 너는 죽상이네. 왜? 노래가 잘 안 돼?”
“늘 그렇죠, 뭐… 잘 되면 그게 더 이상한 날이라 막 혼자 난리치고 그래요. 너무 좋아서.”
“밖에서 몰래 듣고 있었는데 엄청 잘하던데? 계속.”
“아, 왜 남이 노래하는 거를! 엿듣고 그러…… 세요.”
“엿들은 게 아니구 귀가 있다 보니까 저절로 들리데. 그리고 연습실에서 너 혼자만 쩌렁쩌렁하다니까.”
주현이 봉투를 펼치며 말했다. 안에는 삼각김밥과 음료수, 그리고 몇몇 군것질거리들이 들어 있었다. 슬쩍 눈치를 보더니 주현이 그 봉투를 다시 묶어 슬기에게 통째로 안겼다. 이게 뭐예요? 뭐긴 뭐야. 먹을 거지. 당연한 질문이 허탈했는지 주현이 눈을 접으며 피실거렸다.
“아는데요. 그냥 무슨 뜻으로 주시는 건지…”
“너 먹으라구. 연습하다 보면 금방 허기지잖아. 그럴 때 야금야금 까먹으라구.”
“근데 연습실 음식물 반입 금진데.”
슬기는 멀거니 피아노 위에 붙은 연습실 금지 규칙 종이를 올려다봤다. 제 성격상 여기서 뭘 먹을 일은 평생 없을 터였다.
“알아. 그런 건 좀 유도리 있게 넘어가는 거지.”
“냄새 배서 걸리면 저 한 달 동안 연습실 못 쓰는데.”
“너는 되게 신기한 데서 곧이곧대로인 면이 있는 거 같아.”
주현이 입술을 삐죽거렸다. 조금은 뾰로통해 보이기도 했다. 너무 철벽을 쳤나. 답지 않게 시무룩해 하는 것 같아서 신경이 쓰였다.
“그럼 우리 나갈래?”
“네?”
“보니까 연습도 잘 안 되는 것 같은데 기분전환 겸. 그거 나가서 먹자.”
주현이 턱짓으로 봉투를 흘깃거렸다. 저는 근데 아직 연습이 덜…… 생각 없이 놀면 안 된다는 다짐을 하기도 전에 주현에게 팔이 붙들렸다. 곧장 연습실 문이 열렸고 탁하게 뭉쳐있던 공기가 삽시간 화사해졌다. 조금 여유롭게 하면 어때. 주현의 동그란 뒤통수를 보자 불현듯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난해한 감정에 불쑥 끌려가는 느낌이 나쁘지 않았다.
주현은 평소에 먹던 맛없고 퍼석한 학식보다 삼각김밥을 더 맛있게 우적거렸다. 하긴. 생긴 대로 주현은 음식을 좀 많이 가리는 편이었다. 무던하게 뭐든 잘 먹는 저에 비하면 확실히 까다로운 사람이기는 했다. 그치만 지금까지 적어도 제 앞에서 깨작거리는 모습을 보인 적은 없었다. 주현은 그게 제 나름의 노력이라고 표현했는데, 그런 말을 들을 때면 슬기는 되레 갸우뚱해졌다. 나한테 잘 보이고 싶어서 무지 애쓰고 있다고 했던가. 무슨 의중으로 그런 말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날씨 엄청 좋지? 좀 있으면 여기서 꽃 더 활짝 필 거래.”
음식을 다 씹어삼킨 주현이 손을 털며 말했다. 슬기는 군데군데 핀 벚꽃나무를 올려다보며 주현이 준 초콜렛을 한 조각씩 뚝뚝 끊어 느리게 삼켰다. 음악관 바로 앞엔 긴 벤치 여러 개와 작은 놀이터가 있었다. 캠퍼스 온 사방에 사람과 더불어 꽃 천지였다. 바람이 부는 곳마다 달큰한 냄새가 흩어졌다.
“다른 거 많이 사 왔는데 내내 초콜릿만 먹네. 너 초콜릿 좋아해?”
“네? 아, 네.”
한적한 놀이터를 둘러보다 말고 주현이 대뜸 간격을 좁혀왔다. 벤치가 약하게 덜컹거렸다. 넓게 벌려져있던 거리가 순식간에 가까워졌다. 슬기는 초콜릿을 꾹 쥐고 우물대던 입을 앙 다물었다. 이 언니는 원래 이런가…… 막 아무 거리낌 없이 다가오고, 그러면서도 어색한 티가 하나도 안 나고.
“너 머리에 꽃잎 붙었어.”
주현이 불쑥 제 머리 쪽으로 손을 뻗었다. 가는 손가락이 제 머리칼을 옅게 쓸고 지나갔다. 이거 봐봐. 주현이 천진한 얼굴로 손바닥을 펼쳐 보였다. 핑크빛보단 덜 진한 벚꽃잎이 놓여 있었다.
“그거 알아? 떨어지는 꽃잎 한 번에 잡으면 소원 이뤄진대.”
“진짜요? 저는 다르게 알고 있는데. 그거 한 번에 잡으면 사랑이 이루어진다고. 같이 있는 사람이랑 잘 된다는……”
엉겁결에 튀어나온 말이었다. 오, 그래? 너랑 나랑 알고 있는 사실이 다르네. 주현이 신기하다는 듯이 웃고는 벚꽃잎을 슬기의 자켓 위에 올려놓았다. 다분히 장난기 어린 얼굴이었다.
“있잖아요. 저 궁금한 거 있는데 뭐 하나만 물어봐도 돼요?”
“뭔데?”
“언니는 저한테 왜 이렇게 잘해줘요?”
별 대수롭지 않은 질문이었나. 주현이 싱겁다는 듯 픽 웃었다.
“너한테 관심 있어서?”
“언제부터요?”
“처음부터.”
“언제가 처음인지 저는 잘 모르겠는데.”
“아니다. 처음은 아닌가. 보랏빛 향기 부를 때 예뻐서. 그거 울 엄마 노래방 18번이거든. 근데 그냥… 니가 부르니까 느낌이 너무 달라서 좋았어. 뭐, 그랬다고.”
주현이 어물거리며 말을 흐렸다. 슬기는 멀거니 주현의 옆모습만 바라봤다. 뒤로 머리를 넘긴 탓에 새빨갛게 타오른 귀가 잘도 보였다. 저건…… 지금 부끄러운 건가.
“우리 좀 더 친해지자.”
“……”
“너 나한테 말도 좀 놓고. 나 뻥 안 치고 너한테 벌써 30번 넘게 애원했어.”
편해지자고…… 단호하던 목소리가 조금씩 사그라졌다. 주현 본인은 아마 모를 테지만 말꼬리 끝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대답이 없네. 나 별로 마음에 안 드나 보다. 주현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어디에선가 미약한 봄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 화창한 날씨, 따뜻한 햇볕, 적당히 소란스러운 분위기 같은 것들. 안 싫은데. 아니, 사실은 그런 게 아니라.
“안 싫어요.”
“……”
“좀 더 친해지면… 친해지고 싶어요.”
스스로 듣기에도 퍽 어수룩한 말투였다. 작게 인상을 찌푸리고 있던 주현이 금세 표정을 펴고 해맑게 웃었다. 꼭 꽃을 보러 공원까지 가지 않아도 될 텐데. 그럴 필요가 없어 보였다. 절경이 굳이 멀리 있는 것도 아니니까. 슬기는 저를 내려다보는 주현 대신, 바람에 가늘게 흔들리는 벚꽃나무를 올려다봤다. 마치 파우더처럼 흩날리는 옅은 꽃잎들, 싱그럽고 상큼한 향기, 맑은 하늘. 사랑에 빠지기엔 더없이 좋은 풍경들이 눈앞에 빼곡했다.
채플을 마치고 막 강의실을 빠져나왔을 때였다. 주현이 벽에 기대 서 있다 저를 보고 손을 흔들었다. 언니가 왜 여길? 슬기가 알고 있는 사실이 맞다면 오늘 주현의 시간표엔 이 수업이 없었다. 그렇다면 답은 하나였다. 굳이 나를 보러 여기까지 왔다는 것.
“웬일이에요?”
“웬일은. 할 말 있어서 왔지. 너는 꼭 나 볼 때마다 별일 있어야 되는 것처럼 얘기하더라.”
“그런 게 아니라…”
“아. 너 아직 점심 안 먹었지? 언니랑 같이 떡볶이 먹을래?”
“떡볶이요? 사줘요?”
농담이랍시고 던진 말에 주현이 푹 웃었다. 비스듬하게 올려다보는 눈꼬리가 다정했다.
“사줘? 그럼 같이 먹어줄래?”
“뭐 딱히 얻어먹으려고 한 소리는 아니었는데.”
“굳이 얻어먹으려고 수 쓰는 거 난 좋은데. 다른 애들은 말고. 너는 괜찮아.”
“…왜요?”
의문이 한 박자 늦게 떨어졌다. 왜냐고? 주현이 정말 모르냐는 듯 되물었다.
“언니 너한테 관심 있다니까.”
“……저한테 자꾸 장난치시는 것 같은데.”
“장난 아니라니까.”
“으음.”
“아참. 근데 떡볶이 먹으면서 그 얘기 하려고 그랬어.”
주현이 건물 계단을 잘 내려다가 말고 제자리에 우뚝 멈췄다. 슬기는 주현의 동그란 정수리를 내려다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주현의 얼굴에 언뜻 긴장이 서려 있었다.
“너 우리 집에 안 갈래?”
매운 떡볶이를 감흥 없이 삼키면서 슬기는 테이블 밑으로 열심히 수영에게 카톡을 보냈다. 야, 어떡해. 그 언니가 자기 집에 오래. 어떡해. 이거 뭔데? 뭘 거 같아?
[뭐긴 뭐야. 집에 놀러 오라는 거지.]
[아니! 뭐 있는 거 아니냐고. 그냥이야?]
[너 머리에 빵꾸 났냐? 사람 말을 있는 그대로 좀 받아들이고 그래 봐라.]
아니, 진짜로…… 니가 이 말을 눈앞에서 들으면 느낌이 다르다니까. 슬기는 울먹이며 음료수를 삼켰다. 혀엔 이미 감각이 없었다. 그것보다 더 빠르게 머리가 도느라 정신이 없었다.
“뭐 해? 친구랑 문자해?”
“네?”
“아니. 손이 바쁘길래.”
“아아. 친구한테 뭐가 좀 와서. 잠깐만요.”
야. 나 어떡해. 도와달라고. 몇 번을 더 징징거리자 수영이 못 이기겠다는 듯 답장을 보내왔다. 뭘 어떡해. 정 걸리면 그 언니 집 가지 말고 너네 집에 초대하든가.
“진짜 이 기집애가……”
“응?”
“네? 아니요. 아니. 그, 저 언니. 혹시 언니 집 가는 거 말구 저희 집에 오실래요?”
“너희 집에?”
“네. 딱히 별건 없는데, 그냥.”
“그래. 그럼 저녁에 가자.”
“설마, 오늘 저녁에요?”
어. 너 오늘 합주 끝나면 늦게 마치잖아. 나도 과제 다 하면 9시쯤일 걸. 그때 같이 퇴근하면 되겠네. 주현이 유쾌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뿔싸. 내 계획은 이런 게 아니었는데.
“오늘은 좀 너무 갑작스러운데.”
“왜? 집 더러워? 괜찮아. 언니도 별로 깨끗하게 안 살거든.”
“……그러면, 괜찮은가. 저희 집에 가서 뭐 하구 놀아요?”
“뭐 하고 노냐고? 라면 먹자.”
“라면이요?”
“엉.”
뭐 특별한 거 해야 돼? 주현이 물었다. 아니요. 그런 건 아니죠. 슬기는 어물쩡거리며 마지막 남은 떡볶이를 잘근잘근 씹어 삼켰다. 뒤늦게 속에서 매운 불이 올라오고 있었다.
저녁 9시쯤이 되자 캠퍼스는 금세 어둑어둑해졌다. 곳곳 길목에 몇 개의 가로등만이 불을 밝히고 있었다. 주현은 작업실에서 데모 수정 작업을 마치고 음악관으로 내려오는 길이라고 했다. 마침내 정문에서 서로 눈이 마주쳤을 때, 이유도 없이 괜히 웃음이 터졌다. 왜 이러지. 얼굴만 봐도 방금 전까지 속에 쌓여있던 응어리가 확 녹는 기분이었다. 슬기가 웃자 주현이 영문도 모르고 따라 웃었다.
“합주는? 잘 끝났어?”
“그럭저럭요. 기타가 페달 엉성하게 쓰고 저는 자꾸 음 나가고 그래서 애들한테 욕 많이 먹었어요.”
“그럭저럭 아니고 잘 안 끝났네.”
“그냥, 좀 힘들었어요.”
“저녁 라면 가지고 괜찮겠어? 더 맛있는 거 먹어야 될 것 같은데.”
“아. 맞다.”
끝나고 우리 집에 가기로 했지.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 어느 쪽으로 가야 돼? 주현이 골목을 두리번거리며 슬기의 어깨를 가볍게 툭툭 쳤다.
“버스 타야 돼?”
“아니요. 여기서 별로 안 멀어요. 가까운 데서 자취하거든요. 이 골목 쭉 걷다가 막창 집 나오면 오른쪽으로 돌면 돼요.”
“아아. 집이랑 학교랑 진짜 가깝네. 좋겠다. 지각 잘 안 하겠네?”
“지각이요? 좀…… 많, 많이 하는데.”
대꾸가 우물우물 터져 나왔다. 보기보다 꿈지럭거리는 타입인가봐. 주현이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차라리 집이 멀었으면 좋았을 걸. 몇 발자국 걷지도 않았는데 벌써 원룸촌 골목으로 진입 중이었다. 아니지. 내가 괜한 소릴 했나. 첨부터 아예 언니 집에 가자 그럴 걸. 그럼 적어도 이것보단 덜 어색했을 텐데.
“드… 들어오세요.”
슬기는 느릿하게 삐걱대는 대문을 열어젖혔다. 주현은 빼꼼 얼굴을 디밀더니 조심스럽게 신발을 벗고 집안으로 발을 들였다. 그러고 보니 자취를 시작하고 나서 처음이었다. 누군가를 집에 이렇게 데려와본 건.
“집에 뭐 먹을 거 있어? 웬만한 거 없으면 내가 지금 편의점 가서 사 오구.”
“에? 왜요? 라면 먹자고… 했잖아요.”
“아, 라면?”
“네! 라면 먹자면서요. 그래서 온 거 아니에요?”
“어…… 그치. 맞지. 어. 라면.”
나 여기 앉아도 돼? 아니다. 뭐 도와줄까? 가방도 채 내려놓지 못하고 거실에서 우왕자왕하던 주현이 어수룩한 얼굴로 물었다. 아니에요. 됐어요. 저 라면 완전 맛있게 끓이거든요. 저 믿고 맡겨보세요. 다른 건 진짜 못해도 라면은 일류 셰프처럼 끓일 수 있어요. 혼자 주절대는 말에 주현이 못 말린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슬기는 한숨을 내쉬다 기름칠이 덜 된 고물처럼 뻑뻑한 손길로 찬장을 열었다. 마땅히 대접할 게 없다는 건 알고 있었는데 식량자체가 진짜 빈약하긴 했다. 어쩌지. 주현이 이런 걸 좋아하려나. 라면 메뉴 하나도 도통 자신이 없었다.
“육개장 칼국수 괜찮아요, 언니?”
“어. 나 다 잘 먹어. 면 킬러라.”
“진짜요? 면이면 다 좋아해요?”
“응. 나 그런 종류는 안 가리고 다 잘 먹어. 그러니까 해주는 대로 감사하게 받아먹을게.”
주현은 됐다는 말 한 마디에 정말 얌전한 고양이처럼 거실 테이블 앞에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집안 풍경은 그닥 둘러볼 게 없는 탓인지 시선이 슬기의 뒤통수에만 꽂혀 있었다. 웬만하면 핸드폰으로 게임이라도 하고 있지. 아니면 차라리 나한테 말을 걸던가.
“사실 오는 길에 술 사 오려고 했는데.”
“네?”
적막한 공기를 뚫고 주현이 뜬금없이 말했다.
“근처에 편의점이 어딨는지 몰라서. 안 보여가지구.”
“아아. 술은 왜요? 저 술 못하는 거 알잖아요.”
“그냥, 내가 마시고 싶어서.”
주현이 여상한 투와 함께 어깨를 으쓱였다. 능청스럽고 자연스러운 말인데 괜히 엄한 쪽으로 해석이 됐다. 술을 왜 하필 우리 집에서 마시겠다고.
“야, 집에 잔뜩 맛있는 냄새난다.”
“라면 다 됐어요. 잠깐만요.”
슬기는 장갑을 낀 한 손으로는 뜨거운 냄비를, 한 손으로는 그릇 두 개를 쥔 채 거실로 걸어왔다. 주현은 뚜껑을 열더니 오버스러울 정도로 감탄을 했다. 그래봐야 고작 라면인데도.
“잘 먹겠습니다. 진짜 맛있겠다.”
주현이 명랑한 음조로 말하고는 급히 젓가락을 들었다. 천천히… 드세요. 슬기는 그 맞은편에 앉아 눈치를 보며 입술을 축였다.
“너 라면 완전 잘 끓인다. 장사해도 되겠어.”
“맛있어요?”
“어. 나 태어나서 이렇게 맛있는 라면 처음 먹어봐.”
분명 그저 그런 예의상의 빈말일 뿐이겠지만 괜스레 기분이 들떴다. 어쨌든 먹는 사람이 맛있다니 다행이었다. 주현은 칼칼한 국물을 몇 번 떠먹더니 그 뒤로 말없이 꼬들꼬들한 면만 씹어 삼켰다. 슬기는 슬쩍 눈을 들어 작게 움직이는 턱을 멀거니 바라봤다.
“나 이거 먹고 좀 더 놀다 가도 돼?”
“네?”
“…자고 가는 건 안 되나.”
주현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말을 듣자마자 표정이 순식간에 싹 굳었다. 미안, 농담이야. 시선이 마주친 주현이 곧장 손사래를 치며 어색하게 웃었다. 슬기는 한편으론 이해가 안 됐다. 아니, 저 언니는 어떻게 매번 농담이 저런 식이지?
“저기 미안한데, 혹시 집에 밥 좀 있어?”
“없어요.”
“아, 그래.”
“다 먹었으면 이만 치울까요. 언니도 이제 그만 가야 되지 않아요? 벌써 10시 넘었는데. 버스 타려면 지금쯤 나가야죠.”
“어? 아. 좀 더 있다 가도 되는데. 10시 반 넘어서도 차 있어. 많아.”
주현이 허둥거리며 목덜미를 문질렀다. 맵고 뜨거운 걸 먹은 탓인지 입술과 뺨이 빨갰다. 꼭 동네라도 한 바퀴 뛴 사람처럼. 아, 어쩌지. 귀엽다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튀어 오르자 금세 맥박이 빠르게 뛰었다. 눈꺼풀을 느리게 깜빡이다 뭔가 더 할 말이 남은 듯한 주현과 눈이 마주쳤다. 이유도 근거도 몰랐지만 덜컥 무서워졌다. 뭘까. 심장이 왜 이렇게 빨리 뛰는 거지. 이 언니 얼굴이 너무 잘나서 그런가? 그래. 아마 그럴지도 모른다.
“저기 라면 다 먹었는데 이만 가시는 게 낫지 않을… 좋을 것 같기도……”
더듬더듬 내뱉자 주현이 애매한 표정으로 가방을 끌어멨다.
“근데 이 타이밍에 진짜 좀 이상한 소리라서 미안한데, 너 나 초대해서 정말 라면만 먹이고 보낼 거였어?”
“네?”
“아? 아니야. 미안. 아무 소리도 아니야. 잊어버려. 그냥.”
내가 착각했나. 주현이 미간을 좁히고 시무룩하게 웅얼댔다. 집 근처 바로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에 버스정류장이 있었다. 버스 타는 데까지 배웅해줄까요? 선심 쓰듯 물었더니 주현은 되레 혼자 알아서 잘 갈 수 있다며 슬기의 호의를 단호하게 튕겨냈다. 내가 뭘 또 잘못했나. 천연덕스럽게 다가오는 건 잘하면서 주현은 의외로 제 생각이나 감정 같은 건 잘 표현하지 않았다. 슬기는 이래서 주현이 어려웠다. 기복이 쉽게 변하는데 대놓고 알려주는 편은 아니라서.
“다음에 또 라면 먹으러 와요. 다음엔 언니가 좋아하는 걸로 제대로 골라서 끓여줄게요.”
“어. 나 간다. 문 잘 닫고 조심해서 자. 내일 학교에서 봐.”
“네.”
“그리고,”
“네?”
둘은 반쯤 열린 현관문 앞에 마주 선 채 서로를 빤히 바라봤다. 왜 이렇게 뒷목이 뜨겁지. 별로 덥지도 않은데. 부는 바람은 오히려 선선하고 산뜻하기까지 했다.
“말 좀 놓으라구.”
“……”
“더 편해지자. 아니, 지금도 충분히 편한데. 그게 아니라 더 가까워지자고.”
“……”
“나는 너 되게 좋아하거든. 나 그렇게 어려워하지 말라고. 무슨 얘긴지… 알지?”
음, 네. 슬기는 잠깐의 텀을 두고 대답했다. 정확히 무슨 얘긴지 알아듣진 못했지만. 아무튼 지금보다 더 가까운 사이가 됐으면 좋겠다는 거 아닌가. 나 그럼 진짜 간다. 내일 봐. 주현이 머쓱한 듯 콧등을 긁다 천천히 돌아섰다. 체격이 왜소한 건 알고 있었는데 어둠에 희미하게 파묻혀선지 평소보다 어깨가 더 작아 보였다. 어떡하지. 슬기는 주먹을 꽉 쥔 채로 주현의 뒷모습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제자리에 우두망찰 서 있었다. 그렇지 않으면 훅 무너질까봐 혹은 주현의 등을 껴안게될까봐 두려웠다.
금요일 아침이었다. 일어나자마자 주현에게 카톡이 와 있었다. 꽤 이른 새벽에 보낸 메시지였다.
[당연히 자겠지? 우리 오늘 학교 하루 째고 벚꽃 보러 놀러 갈래? 언니가 맛있는 거 사줄게. 싫으면 거절해도 되고. 보면 꼭 답 좀.]
싫으면 거절해도 되고. 유난히 아무렇지도 않게 섞여있는 그 문장이 마음에 걸렸다. 꼭 거절하지 말라는 것처럼 보내놓고서는. 슬기는 몇 번 더 메시지를 들여다보다 주현에게 답장을 보냈다. 좋다고. 어디서 몇 시에 만나자는 내용까지 길게 덧붙였다.
“얘는 누구야?”
주현이 슬기 옆에 선 사람을 올려다보며 얼빠진 얼굴로 물었다. 약속 장소로 지정된 한강 공원은 평일임에도 불구하고 어딜 가나 사람이 많았다. 쾌청한 날씨 때문이겠지. 가족과 연인들로 길거리마다 인파가 북적거렸다. 혹시나 싶어서 데리고 왔어요. 슬기는 속내를 삼키고 괜스레 유쾌한 목소리로 말했다.
“친구요. 고등학교 친구.”
“안녕하세요. 박수영이라고 합니다.”
수영이 낯선 기색도 없이 고개를 꾸벅 숙였다. 주현은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인지 당황한 눈빛으로 어어, 하고 대꾸했다. 오늘 너도 학교 하루 째라. 내가 일당 줄게. 아님 맛있는 거 사줄 테니까 어쨌든 나와. 수영은 내가 니 데이트에 왜 끼어야 하냐며 코웃음을 치다 일당을 더 세게 올려준다는 말에 못 이기는 척 승낙을 해왔다.
“친구랑 셋이 같이 놀아도 되죠?”
“어? 어어. 그럼. 더 재밌겠네.”
주현이 못마땅한 눈길로 수영을 훑었다. 야, 너 나 잠만 봐. 죄송한데 잠시만요. 수영이 주현에게 양해를 구하고 거리를 살짝 띄운 뒤 슬기의 어깨를 돌려세웠다. 뭐가 쓸데없이 억울한가. 손아귀에 담긴 힘이 억셌다.
“야.”
“응?”
“뭐야, 진짜. 저 언니 연예인이야?”
“아니. 뭔 소리야? 그냥 학교 선배지. 뭘.”
슬기는 헛소리를 하는 수영을 멀뚱히 올려다봤다. 진짜 대단하잖아. 뭐가? 야. 감흥이 안 와? 저 언니 얼굴이!
“야…… 저 언니가 너한테 대박 잘해준다고? 저 얼굴로?”
“어. 엄청.”
수영이 힐끔 주현을 바라보다 다시 슬기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저런 얼굴로 들이대면 뭐든 오해할 만하겠네.
구전 설화 같은 얘기 말고 실제로 주현을 맞닥뜨린 수영의 감상은 그랬다.
벚꽃이 한창이었다. 자전거를 타는 연인들, 아이와 산책을 나온 엄마, 나들이를 나온 친구들로 공원이 한껏 붐볐다. 주현은 쉴 새 없이 수영과 슬기의 손에 먹을 걸 쥐여주더니 수영이 배가 부르다고 할 쯤에야 뇌물공세를 관뒀다. 핫도그와 햄버거, 김밥과 치킨까지. 온갖 기름진 걸 다 욱여넣었더니 아까부터 목이 칼칼했다.
“둘이 여기서 잠깐만 기다려.”
주현이 갑자기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 앉아있던 벤치에서 일어나 어딘가로 급히 달려갔다. 수영은 화사한 꽃잎이 떨어지는 풍경 아래서 셀카를 찍는 데 여념이 없었다. 야, 나 너무 예쁘게 나온 것 같지 않아? 수영이 제 핸드폰 액정을 들이대며 물었다. 찍힌 사진들은 하나같이 다 미소가 과했다. 어련하시겠어. 의미 없이 몇 번 수영의 장단을 맞춰주다 이내 시들해진 참에야 주현이 자리로 돌아왔다. 작은 두 손엔 하늘색 솜사탕 두 개와 물이 들려 있었다. 슬기와 수영에게 물과 솜사탕을 건네며 주현이 씩 웃었다. 군더더기가 없는 미소였다.
“와. 언니 쟤 거는 예쁜 꽃 모양인데 제 거는 왜 찌그러진 휴지처럼 생겼어요?”
“어? 그러네. 미안. 급하게 받아오느라 모양 어땠는지 신경 쓸 틈이 없었어.”
“강슬기는 그 와중에 멀쩡한 거 받아먹고.”
수영이 밉지 않게 투덜거렸다. 미안. 지금 가서 다시 예쁜 거 사줘? 주현이 쩔쩔매며 입술을 씹었다. 아니에요. 됐어요. 그냥 해본 말이지. 솜사탕을 입에 넣더니 수영은 언제 그랬냐는 듯 금세 천진하게 웃었다. 단순한 걸로 치자면 얘나 나나 별 할 말이 없었다.
“솜사탕이요.”
“응.”
“달아요.”
“많이 먹어. 많이 먹을 것도 없지만.”
“근데 언니 솜사탕이랑 물은 왜 샀어요?”
하릴없이 달기만한 설탕 덩어리를 뜯어 먹다 보니 문득 드는 생각이 그거였다. 이 언니는 왜 나랑 박수영 시중들 듯이 이렇게 잘해주고 있지? 자기는 하나도 안 챙기고. 이리저리 바쁘게 뛰어다니느라 주현의 이마에 미약한 땀이 맺혀 있었다. 왜 샀는지가 먹다 보니까 뜬금없이 궁금해? 주현이 어린애를 달래듯 다정한 말투로 물었다. 나이차로 따져도 고작 세 살 차인데. 이 언니는 항상 날 다섯 살짜리 취급하듯 대하는 경향이 있다.
“솜사탕은 너가 좋아할 것 같아서.”
“……”
“물은 너 목 마를까봐.”
수영이한테는 비밀이야. 친구 잘 삐지는 성격 같은데. 주현이 슬기의 귓가에 대고 조곤조곤 속삭였다. 둘이 무슨 얘기해요? 손이 찐득해졌다며 울상을 짓던 수영이 주현과 슬기 사이로 불쑥 고개를 들이밀었다. 화장실 가자고. 슬기도 손 씻고 싶대. 주현이 능청스럽게 말했다. 수상해. 수영이 가는 눈을 뜨고 슬기와 주현을 번갈아 흘겨봤다. 둘이 수상해, 수상하다고. 그 말만을 중얼거리면서.
여러 가지를 둘러보고 이것저것 얘기를 나눈 것뿐인데 어느새 저녁이었다. 이대로 헤어지기는 아쉽다고 수영이 칭얼거렸다. 그때였다. 자기가 잘 아는 삼겹살집이 있다며 주현이 나서서 고기와 술을 사겠다고 했다. 오늘 하루 종일 얻어먹는 것 같은데. 슬기가 무안하게 중얼거리는 틈에 수영이 감사합니다, 하고 선뜻 허리를 굽혔다. 뭐 어때. 이 정도 호의는 받아도 괜찮겠지. 주현의 웃는 얼굴 때문인지 마음에 나돌던 걱정도 금세 접혔다.
“천천히 꼭꼭 씹어서 먹어.”
주현이 자상한 목소리로 말하면서 제 앞에 물잔을 밀어줬다. 고기가 앞에 있는데 천천히 먹으라고? 슬기는 잠시 주현의 얘기를 듣다 쌈을 싸는데 집중했다. 주현은 먹기보단 열심히 고기를 굽는 편이었다. 덕분에 자리에 멀거니 앉아있던 우리만 편하게 밥을 먹게 됐다. 이모 여기 참이슬 한 병이요! 기필코 안 친한 사람과 있는 자리에서 술은 안 마신다더니. 수영은 고기가 익자마자 대뜸 소주부터 시켰다.
“안 친한 사람이랑 술은 절대 안 마신다며.”
“누가? 누구랑 누가 안 친하대? 나 주현 언니랑 친해. 몇 시간 만에 완전 가까워졌잖어.”
술도 안 들이켰으면서 수영은 벌써 취한 태세였다. 너 술 잘 마셔? 주현이 힐끗 눈길을 넘기며 수영에게 물었다. 네. 저 주량 기본이 3병이에요. 대박이죠? 수영이 어깨를 들썩이며 유쾌하게 웃었다. 어디서 저런 뻥카를. 슬기는 잠자코 입을 다문 채 우적우적 고기를 씹었다. 말은 저렇게 해도 수영은 한 병 이상 더 들어가면 제정신을 못 차리고 휘청거리는 타입이었다. 나중에 골골거리면서 집에 데려다 달라고 떼나 안 쓰면 다행이지.
“쟤는 여기서 집 가까워?”
“왜요?”
“그냥.”
분위기가 제법 무르익고 있을 때였다. 손으로 연기를 휘젓던 주현이 헛기침을 하며 물었다.
“그렇게 멀진 않아요. 어… 좀 불편해요? 이제 집에 보낼까요?”
“아니야. 그런 거 아니구.”
주현이 고개를 저었다. 나 빼고 둘이 무슨 얘기해요? 아, 같이 술도 안 마셔주고. 진짜 더럽게 재미없는 사람들이야. 수영이 잔에 술을 따르며 중얼거렸다. 쟤는 쉬지도 않고 잘도 마셔댄다. 술기운이 꽤 오른 것 같은데 그에 비해 헛소리를 많이 하는 편도 아니었다.
“아, 잠깐만. 나 화장실 갔다 올게요. 둘이 고기 먹고 있어 봐요.”
꼭 자기가 사는 것처럼 말하네. 주현이 파채를 씹으며 짓궂게 키득거렸다. 수영이 테이블 모서리를 짚고선 자리에서 어정쩡하게 일어났다. 활기가 돌던 눈이 반쯤은 취기에 절어 풀려 있었다.
“화장실 같이 가줘. 쟤 상태 안 좋은 것 같은데.”
주현이 제 신발로 슬기의 운동화코를 쿡쿡 찌르며 말했다. 아, 어쩔 수 없지. 슬기는 쌈을 사던 손길을 멈추고 뒤따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수영은 비틀거리며 굽은 어깨로 느릿느릿 걷고 있었다. 문을 열고 화장실 안으로 들어서자 수영은 잠시 비척대더니 세면대 물을 틀어 손을 씻기 시작했다. 야, 진짜 대박. 두어 번 눈을 깜빡이던 수영이 난데없이 그렇게 말했다.
“응?”
“저 언니 너한테 진짜 잘해준다. 눈에서 막 당장이라도 하트 나올 것 같던데?”
“뭐야. 너 안 취했어?”
아까 전과 달리 말을 뱉어내는 목소리가 또렷했다. 당연하지. 나 아직 백 잔도 더 거뜬해. 걍 연기 좀 한 거지. 수영이 윙크를 하며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손을 털어냈다.
“염치로 보아 중간에 분명 빠졌어야 되는데 타이밍을 잘 못 잡아가지구.”
“엉? 뭔 소리야?”
“너 예전에 나한테 진지하게 고민 상담한 적 있지. 저 언니 너한테 수작 부리는 거 맞어.”
“뭐? 뜬금없이.”
“안 뜬금없어. 앞길 술술 풀리고 싶으면 내 말 잘 들어봐봐.”
“뭘.”
수영의 목소리가 점점 작게 잦아들었다. 아예 속삭이는 수준이었다. 또 뭔 소릴 하려고. 그런 마음이었으나 슬기는 아닌 척 수영의 어깨 너머로 가까이 다가섰다. 수영의 얼굴은 평소와 다르게 중대하고 비장해 보였다.
“자빠뜨려.”
“에?”
“자빠뜨리라고. 저 언니. 용기 있게, 패기 있게.”
“무슨……”
“내 말 명심해. 잘해주는 지금이 타이밍 적기야. 자빠트리는 게 무서우면 타이밍 봐서 잘 자빠져줘. 용기 있게, 패기 있게.”
“너는 지 앞가림은 제대로 못하면서 맨날 훈수만 잘 둬. 어?”
“그러니까. 그게 뭔 소리겠어. 내가 천재라는 거지.”
한바탕 호쾌하게 웃음을 터뜨린 수영이 슬기의 등을 떠밀었다. 좁은 화장실 구석구석이 큰 목청 때문에 쩌렁쩌렁 울렸다. 정신줄 잡고 제대로 뭐 좀 해봐. 실실거린 수영이 덧붙였다. 난 술 때문에 먼저 쩔어서 집에 간다 그럴 테니까.
“야.”
“어.”
“근데 내가 먼저 티 나게 들이대면 이상하게 볼까?”
한참 묵고 묵힌 뒤에야 불현듯 튀어나온 속내였다. 웃기는 소리. 수영이 무슨 말이냐는 듯 눈매를 흘겼다.
“이상하게 보긴. 좋아하지.”
“진짜?”
“저 언니랑 잘해보고 싶어?”
“솔직하게 말해?”
“어.”
“예쁨 받고 싶은데.”
컥. 사레가 들린 듯 수영이 연달아 헛기침을 했다. 어이없는 한편 신기하다는 눈빛이었다. 강슬기, 너 어쩌다 저 언니한테 이렇게 꼬인 거야?
“나 알아서 먼저 잘 간다고 할 테니까 너 집에 데려다 달라 그래.”
“데려다 달라고 하라고? 무슨 염치로? 저 언니도 밤길 무서울 텐데.”
“얘는 진짜… 그니까, 그게 작업이라는 거예요.”
“나 집에 혼자 잘 갈 수 있는데.”
“……니가 이래서 안 되는 거야.”
수영이 답답하다는 듯이 슬기의 어깻죽지를 퍽퍽 내리쳤다. 아, 아파! 아까 내가 한 얘기 뭘로 들었어. 귀로 들은 거 아니고 발바닥으로 들었지. 참나 내가 못 살아. 다시 들어봐봐. 내가 계획을 짜줄 테니까 이 코스로 가보라고. 수영이 애교에도 단계가 있다며 나름 논리적인 전개로 설명을 펼치기 시작했다. 슬기는 멍하니 설교를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말이야, 중요한 건 타이밍이라는 거지. 잘 자빠뜨리거나, 잘 자빠져주거나.
화장실에서 혼자 돌아오자 주현은 다소 의아해했다. 수영이는 어디 갔어? 걔 술 먹고 속이 너무 안 좋아서 집에 먼저 간대요. 혼자 보냈어? 네. 잘 갈 수 있다 그래서. 걱정 말래요. 슬기는 소질도 없는 거짓말을 어영부영 늘어놓으며 의자를 끌어앉았다. 주현은 잠시 걱정스러운 얼굴을 하는 것 말고는 큰 코멘트가 없었다. 아니, 사실 어쩌면 수영이 더 일찍 집으로 돌아가길 바랐을지도 모른다.
자리에 앉아 핸드폰을 몇 번 넘겨보던 주현이 슬기를 빤히 쳐다봤다.??우리도 이만 집에 갈까? 다정하고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수영과 맞춰주느라 같이 술을 몇 잔 마셨는데도 주현은 애초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멀끔한 얼굴이었다. 슬기는 당연스럽게 빌지를 들고 카운터 쪽으로 향하는 주현의 뒷모습을 멀뚱히 바라봤다. 저 언니는 원래 술이 센 건가. 저번 MT땐 그나마 얼굴이라도 좀 빨개지는 것 같더니.
“안 가?”
가게 문 앞에 선 주현이 눈짓을 하며 물었다. 가야죠. 얼빠진 모양새로 의자에 앉아있다가 슬기는 곧바로 짐을 챙겼다. 핸드폰을 넘겨봤더니 벌써 10시가 넘어 있었다. 우연처럼 매번 이런 식이었다. 우습게도 애매하고 아슬한 시간대에 늘 자리가 파투 났다.
“있잖아.”
“네?”
“나 집에 좀 데려다주면 안 돼?”
주현이 웃으며 몸을 치대왔다. 자연스럽게 팔짱을 끼고 슬기의 허리에 바짝 붙은 채로 주현은 느릿느릿 길을 걸었다. 절로 숨이 조였다. 좀 떨어지라고 말하기도 어색한 타이밍이었다. 이 언니는 왜 갑자기 안 하던 짓을……
“여기서 몇 번 타면 돼요?”
“603번.”
“집까지 가려면 멀어요?”
“아니. 한 다섯… 아니다, 일곱 정거장인가.”
“머네요. 안 멀긴.”
버스정류장은 가게에서 퍽 가까웠다. 주현은 도착하자마자 의자에 앉아 슬기의 손등을 붙들고 흥이 난 듯 발을 굴려댔다. 그래도 기분이 좋아 보이니까 다행인가. 슬기는 숨을 참아가며 여유로운 척 주변 풍경을 둘러봤다. 곳곳에 불이 켜진 가로등과 바쁘게 달리는 자동차들과 색이 예쁜 꽃나무들이 보였다. 특별히 향수를 뿌린 것도 아닌데 공기 중엔 온통 산뜻한 향들이 가득했다. 봄이 완연하다는 증거일 터였다.
“언니, 저기 버스 왔는데……”
“저거 하나 보내고 다음 거 타자. 조금만 이렇게 있으면 안 돼?”
몇 분쯤 지났을까. 눈앞에 603번 버스가 정차했다. 많은 사람들이 타고 또 많은 사람들이 내렸다. 시간은 묵묵히 흐르고 있었다. 주현은 말없이 눈만 굴리고 있더니 나중엔 뭐가 신나는지 허밍까지 흥얼거렸다. 슬기는 마른침을 삼키다 바닥을 긁어대고 있는 주현의 운동화를 내려다봤다. 혼자만 이렇게 초조한 것 같았다. 주현은 당연히 지금 아무 생각이 없을 텐데.
“어, 언니. 저기.”
“슬기야. 나 졸려. 좀만 있다 가자. 나 몸에 지금 힘도 없구.”
주현이 어린 목소리로 칭얼거렸다. 주변 사람들이 흘깃흘깃 둘을 쳐다보다 이내 지나쳐갔다. 정류장은 주변은 금세 한적해졌다. 곳 버스가 끊길 시간이었고 모두가 바빠 보였다. 당연했다. 전부 돌아갈 곳이 있으니까. 슬기는 천천히 초를 세다 이윽고 주현을 따라 눈을 감았다. 억지로 여유로울 필요는 없지만 그렇다고 괜히 급해질 필요도 없었다. 슬쩍 휴대폰을 열었더니 시간이 때마침 11시 정각으로 바뀌었다. 타이밍 좋게 다시 603번 버스가 눈앞에 정차했다.
“저거 막찬데.”
“…오늘 집에 안 갈 거예요?”
“가야지. 가자. 일어나.”
“네?”
자리에서 일어나는 속도에 맞춰 603번 버스가 저만치 멀어졌다. 떠나가는 버스의 뒤꽁무니를 바라보며 슬기는 눈매를 가늘게 치켜떴다. 주현이 저를 귀엽다는 듯 지그시 올려다보고 있었다.
“왜, 왜요? 얼굴이 이상해……”
“너 귀여워가지구.”
또다. 저런 식의 가벼운 농담. 슬기로서는 주현이 도무지 무슨 속내를 품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언니 집 여기서 한 5분만 걸으면 돼. 가자.”
“네?”
“둘이 오붓한 시간 보내려고 수 좀 썼는데. 예상외로 너무 잘 먹히네. 그 짧은 새에 긴장도 엄청 하시고.”
주현이 놀리듯 고개를 까딱이며 슬기에게 손을 뻗었다. 데려다 달라고 부탁을 했으니 어쩔 수 없었다. 슬기는 못 이기는 척 주현의 손을 맞잡고 땅에 시선을 꽂은 채 걸었다. 속았어. 사람 놀려 먹는데 완전 도가 텄다. 주현이 손을 깍지로 바꿔 끼우고는 소리 없이 웃었다. 속수무책으로 말려드는 기분이었지만 왠지 나쁘지 않았다. 슬기는 주현의 집 방향으로 걸어가면서 수영이 일러준 충고 하나만을 생각했다. 야, 적극적이어야 돼. 니가 먼저 다가가봐. 그 언니 꿍꿍이 알아낼려면 이 방법이 최고라니까.
주현의 집으로 향하는 길목 근처에 편의점이 하나 있었다. 슬기는 잠시 고민하다 주현에게 살 게 있으니 밖에서 기다려달라고 말했다. 뭐 사는데 바깥에서 기다리래? 주현이 볼을 부풀린 채 고개를 갸우뚱 꺾었다. 그냥요. 잠시만요. 슬기가 편의점에서 물건을 고를 동안 주현은 편의점 유리문을 넘겨다보며 운동화로 바닥을 질질 끌었다. 얇은 돌들이 채이며 버석버석한 소리가 났다.
“다 샀어요. 가요.”
편의점 문을 밀고 나온 슬기가 멋쩍은 얼굴로 손을 휘저었다. 잠시만. 나도 살 거 있어. 여기서 잠만 기다려. 주현은 싱긋 웃으며 편의점 문을 열었다. 예상치 못한 행동에 당황한 듯 등 뒤에서 슬기의 혼잣말이 들렸다.
뭘 샀을까. 가늠해봤지만 꼽기는 쉽지 않았다. 주현은 일단 수입맥주 네 캔을 계산하고 잡화 매대를 둘러봤다. 손에 아무것도 안 들려 있던데. 뭐 사탕이나 껌 같은 걸 골랐을까. 이것저것 고심을 하다 불현듯 눈길이 본능처럼 그곳으로 떨어졌다. 설마. 이걸 샀을 리가 있나. 주현은 동이 난 5천 원짜리 콘돔팩을 한참 쳐다보다 카운터로 걸어갔다.
“죄송한데요.”
“네?”
“아까 방금 물건 사 가신 여자분이요.”
“네.”
“그, 혹시……”
“예?”
남자 알바생은 말을 길게 끌자 귀찮아하는 눈치였다. 아니에요. 죄송합니다. 주현은 단도직입적으로 물을까하다 이내 말을 삼켰다. 이런 발상을 하는 스스로가 우스꽝스러웠다. 강슬기가 그동안 나한테 얼마나 철벽을 쳐댔는데. 주현은 연달아 의미없는 사과를 하다가 결국 편의점을 빠져나왔다. 언니 집 바로 여기예요? 슬기가 말간 얼굴로 밀집된 자취촌을 가리켰다. 어어. 천진한 눈을 보자 괜스레 당혹감이 스몄다. 가, 가요. 얼른. 슬기가 주현의 손을 잡아끌며 어색하게 재촉했다. 맞잡은 손바닥이 신기할 정도로 뜨거웠다. 나 이래도 되나. 주현은 슬기의 동그란 뒤통수를 보며 입 안쪽 살을 짓이겼다. 머릿속이 이리저리 엉킨 선처럼 복잡했다.
“드… 들어와.”
주현은 현관문을 열며 제가 왜 이렇게 긴장하고 있나를 생각했다. 평소와 다름없이 매일 생활하던 공간이고 어제와 별 다를 것 없는 그저 그런 풍경이었다. 기껏 사람 하나를 초대했다고 이렇게 떨 필요가 있을까? 허나 의문과는 다르게 목울대가 울렁거렸다. 차라리 우리 집으로 가자는 게 아니라 슬기를 데려다준다고 할 걸 그랬다. 슬기가 눈치를 살피며 거실 문턱을 밟자마자 주현은 곧바로 후회했다. 수영과 어쩌다 술도 마셨겠다, 적당히 취했겠다, 눈앞엔 귀엽고 천지도 모르는 후배가 있겠다. 여러모로 위험한 상황이었다.
“뭐, 뭐 할래? 라면 먹을까? 집에 과자도 있고 음료수도 있는데.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뭐 줄까?”
“언니.”
“어?”
슬기가 한껏 비장한 얼굴로 운을 뗐다. 도리어 당황한 건 주현이었다. 얘는 왜 하필 내 집에서 저런 얼굴이지. 괜히 정신이 없었다.
“저 좋아해요?”
“어?”
“……아닌가.”
“……”
“아니면 저 지금 쪽팔려서 여기서 도망가야 되는데.”
슬기가 목덜미를 문지르며 천장을 둘러봤다. 왜 쪽팔린데? 뒷일이 무서운 게 아니고? 묻고 싶었으나 입이 붙은 듯 떨어지지 않았다. 꽉 긴장이 억눌린 분위기는 무거웠다. 주현은 뒤죽박죽인 생각들을 눌러두고 힐끗 슬기를 훔쳐봤다. 술도 안 마셔놓곤 콧망울과 귀가 빨갰다. 뺨엔 연하게 홍조가 올라 있었다.
“너… 취했지?”
주현은 조심스레 슬기의 뺨에 손을 갖다 댔다. 아닌가. 분명 술은 안 마셨는데. 내가 모르는 새에 몰래 들이부었나. 아니면 수영이 애한테 술을 궤짝째로 먹였나. 방금 날아든 질문이 하도 뜬금없어서 그런 착각까지 들었다.
“저 편의점에서 이거 샀는데……”
슬기가 손바닥을 펼쳐보이며 굼뜨게 말했다. 아, 설마 했는데 진짜 이걸 샀을 줄이야. 얼마나 꽉 쥐고 있었는지 팩 모서리가 잔뜩 구겨져 있었다. 왜 샀는데? 주현은 호흡을 꾹꾹 다스리며 물었다. 까딱하다간 저도 모르게 엄한 말이 튀어나올 것 같아서였다. 슬기의 고개가 서서히 으스러지다 팩 꺾였다. 한참 땅을 보던 슬기가 느리게 말했다.
“저 언니랑 자고 싶어서……”
“……”
“있잖아요. 저 진짜 궁금한 거 있는데 하나만 물어봐도 돼요?”
“뭔데?”
“언니는 저 언제부터 좋아했어요?”
나름대로 제 선에선 용기를 낸 뻔뻔하고 귀여운 질문이었다. 주현은 언제부터 빠졌던가를 헤아리다 싱겁게 웃었다. 지금 이 상황에서 그런 게 무슨 상관이 있다고.
“너가 MT때 노래 부를 때부터? 아니다. 너 막 올리다가 탈진해서 기력 다 떨어져가지고 새근새근 자는데 너무 귀여운 거야. 그때부터였나.”
“대체…… 이유가 뭐 그런…”
“몰라. 나 그냥 너 처음부터 좋았어. 귀여워서.”
“……뭐야. 근데 언니는 편의점에서 뭐 샀어요?”
이야기를 듣다 아차 싶었는지 그제야 슬기가 궁금한 얼굴로 물었다. 그게 이 타이밍이 궁금하다니. 참 답다 싶었다. 주현은 가방 지퍼를 열고 편의점에서 받은 봉투를 꺼냈다. 봉투에 든 내용물을 들여다보던 슬기가 입술을 짓씹었다. 아마 제 생각과는 다른 물건이 든 모양이었다.
“난 그냥 너랑 같이 술 한 잔 하려고 데려다 달라 애교 좀 부려본 건데.”
“……”
“내가 앞서 나갔는지, 니가 앞서 나갔는지.”
“아, 진짜 박수영……”
슬기가 자괴감이 든 듯 손바닥으로 얼굴을 감싸 쥐었다. 아까까지 열만 올라있던 귀는 이제 터질 듯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그럼 어쩔 수 없어요.”
“……뭐가?”
“저는 버스 끊겼는데.”
슬기가 쑥스러운 얼굴로 더듬더듬 말했다. 와, 얘 봐. 주현은 속으로만 헛웃음을 들이켰다.
“택시 타고 가. 데려다줄게.”
“……”
“농담이야. 근데 진짜 자고 갈 거야?”
“저 그럼 갈까요? 별 상관은 없는데.”
별 상관있어 보이는데. 슬기가 초조한 듯이 주현을 내려다봤다. 깜빡대는 눈동자 아래 진득하게 긴장이 덮여 있었다.
“너 근데 그거 버려. 그거 구려.”
“네?”
“언니한테 더 좋은 거 있어. 훨배 비싼 거. 그거 쓰자.”
“……”
“집에 안 간다며. 나 안 보낸다, 진짜로?”
무슨 답을 듣기도 전에 주현이 급하게 슬기의 아랫입술을 물었다. 동시에 슬기의 손에 들린 콘돔 팩을 까득 구겼다. 역시 뭘 모르는 애답다. 이런 걸 어떻게 쓰겠다고. 주현은 얇은 티셔츠를 말아올리며 슬쩍 웃었다. 하얗고 작은 손이 제 목덜미를 천천히 쓸어내렸다. 그리 넓지 않은 방의 공기가 슬슬 달구어지고 있었다. 이제 앞으로 순진하게 어설픈 척은 하지 말아야지. 슬기는 주현의 어깨를 제 쪽으로 홱 끌어당기며 생각했다. 이 밤을 다 지새고 나면 내일 집으로 가는 길에 수영에게 메시지를 보내야겠다. 야, 자빠뜨리기는 무슨. 그럴 틈도 없었어. 그리고 말이야. 나는 얌전히 자빠지는 게 취향이더라, 하고.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