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me / 타이밍
*오메가버스란?
남녀 상관없이 임신할 수 있는 세계관을 뜻한다.
알파 : 고유의 향 (페로몬) 을 가지고 있으며, 우성알파와 열성알파로 나누어진다.
오메가 : 고유의 향 (페로몬)을 가지고 있음. 우성오메가와 열성오메가로 나누어진다.
(우성이 열성보다 페로몬의 세기가 더 높다)
베타 : 그냥 일반인
히트사이클 : 한 달에 한 번씩 주기적으로 일어나는 오메가의 발정기. 원하지 않아도 페로몬이 최대치로 뿜어내게 되며 이를 막기 위해 억제제를 먹는 경우가 있다.
러트사이클 : 알파의 히트사이클.
1.
"으음……."
슬기가 몸을 뒤척거렸다. 오전 11시 45분. 세상은 빠르게 돌아가고 있을 시간이지만, 현재 휴학 선포를 한 채 버젓한 일자리, 아니, 알바 하나 구하지 않은 무직 신세의 강슬기가 일어날 시간일리는 만무했다. 하지만 그녀에게 '강슬기 알바생이라도 만들어보기' 동아리의 열성적인 회원이 졸졸 따라다닌다면 얘기가 달랐다.
카톡, 카톡, 카톡, 카, 카, 카, 카……. 카톡으로 뭘 하는 건지 끊이질 않는 알림음에 슬기가 신경질적으로 일어나 눈을 부비며 핸드폰을 켰다. 발신인은 다름 아닌 슬기의 고등학교 동창인 김예림. 아, 왜 아침부터. 시간을 확인하니 아직 한참 자신이 자고 있을 시간이었기에 속으로 육두문자를 삼키며 내용을 확인했다.
김몌밈
ㅡㅡㅡㅡㅡㅡ
야
야
ㅇ
ㅑ
양야ㅑㅑ
ㅑㅑㅑㅑㅑㅑ
왜
너 커피숍에서라도
근면성실하게 일해볼 생각 없냐
아침부터 할 얘기가 그거야?
웅
;;; 안한다고 몇번을 말해
나는 휴식이 필요해
너는 휴식을 무슨 겨울내내 해
니가 곰새끼야? 겨울잠 자게
심지어 이제 4월이야
뭐
왜
아직 춥거든;;; 추우면 겨울임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고
니 성깔때문에 말 안하려다가 내가 아는 분이 사장님이라서
추천해주는 거임
1시부터 6시까지만 하면 돼
그래서
카페 알바가 시급 구천오백원
이 정도면 꿀이지
안 해
야
너 아니고도 할 사람 많아;;
그럼 그 사람들한테 하라고 그래
통장으로 생활비 잘 들어오네요
평생 손만 벌리고 살 거니
제발 가보기만 해봐
고기 사줄게
...
같은 타임에 개예쁜 알바생 있다더라
몇시에 면접?
;;; 태세전환 오지네
잠만 있어봐 물어볼게
ㅇ
딱 한시에 시간되신대
너무 빠듯한 거 아니야??
나 아까 일어났는데
그건 니가 알아서 하고
진짜 개지랄
ㅡㅡㅡㅡㅡㅡ
매일 집에서만 뒹굴며 오징어짬뽕만 먹어댄 탓에 몰골은 말이 아니었다. -사실 어젯밤에도 먹었다- 슬기의 위생관념이 그렇게 철저한 편은 아니었기에 심각함은 더했다. 사람의 본분을 잊어버린 듯한 얼굴을 심각하게 쳐다보다 세수를 벅벅 했다. 아, 이럴 줄 알았으면 평소에 뭐라도 좀 해 놓을걸. 이루어질 수 없는 소망을 주저리주저리 늘어놓으며 손에 잡히는 트레이닝복을 입고, 머리는 대충 똥머리로 틀어올렸다. 강슬기는 집을 나갈 때 그렇게 꾸며서 나가는 편이 아니었다. 정작 자신은 엄청난 얼빠인데 말이다.-짜릿해 잘생긴게 최고야-
면접 보러 가는데 너무 성의없는건가 싶기도 했으나, 동네카페였기에 말이 면접이지 인수인계나 받을 것이 뻔했다. 구석진 동네카페에 알바 경쟁자가 있겠냐는 생각도 들자 아까 했던 걱정이 쓸데없이 느껴지기 작했다.
'에라 모르겠다' 마인드는 꽤 유용하다. 모든 말의 끝에 에라 모르겠다를 붙이는 것 말이다. 내 몰골을 보고 혹시 사람이 맞긴 한 거냐고 물어본다면…… 에라, 모르겠다! 카페에서 면접을 빡세게 한다면…… 에라, 모르겠다! 타노스가 나타나 지구의 반쪽을 날려버린다고 해도 에라, 모르겠다를 중얼거릴 수 있는 상태까지 이르자 슬기는 이상한 자신감에 휩싸였다. 할 수 있다, 강슬기. 고기 얻어내자!
"강슬기! 할 수 있다!"
슬기는 청춘드라마에 나오는 긍정적인 여주인공처럼 주먹을 꽉 쥔 채 검정 스니커즈를 신고 문 밖으로 달려나갔다. 만약 자신이 그냥 커피숍 알바를 하러 가는 거였다면 이렇게 행복할 수 있었을까? 를 생각하며 말이다. 슬기의 답은 '아니오' 였다. 김예림이 소고기를 사주던, 돈을 벌던 간에 일단 존예 알바생이 내가 일하는 타임에 있다는 것이 가장 끌렸다. 김예림은 적어도 예쁘다는 칭찬을 막 하는 아이는 아니니까! 속물처럼 들릴 수는 있겠지만, 슬기는 '잘'생긴 사람을 좋아했다. 특히 잘생긴 여자를 광적으로 좋아했다. 김예림이 이 점을 노리고 알바하라고 구라치면서 꼬드긴 것 아닌가 싶기도 했지만…… 에라, 모르겠다!
여러 생각들을 하다 보니 벌써 카페에 도착했다. 카페에 들어가기 전, 유리창에 비치는 모습을 보며 괜히 머리도 정리해보고, 웃는 모습을 연습해 보기도 했다. 인간같기는 하네. 살짝 웃음을 지으며 카페에 들어서 살갑게 인사를 하는 슬기였다.
"안녕하세요!"
"어, 네가 강슬기니?"
"네."
카페의 사장처럼 보이는 푸근한 인상의 여성이 미리 만들어 놓은 토스트와 커피를 가져다주었다. 슬기의 본 목적은 면접이었지만 어째 할머니 집에 놀러온 것 같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예림이한테 얘기 들었어."
"아,"
"처음에는 안 한다고 떼를 쓰다가, 고기 사준다니까 왔다던데. 열심히 할 수 있는 거고?"
"컥, 컥…… 당…, 연하죠."
꼬부기 새끼 뭐 그런 것까지 꼬박꼬박 일러바치냐. 슬기는 컥, 컥 소리를 내면서도 커피를 꿀꺽꿀꺽 마셨다. 당연하죠, 라는 대답을 호기롭게 내놓았지만 그 대답에는 전제가 있었다. 그렇게 예쁘다는 알바생이 저랑 같은 타임이라면요. 미처 하지 못한 다음 말은 목구멍에 조용히 넣어둔 채 슬기는 사람 좋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슬기는 카운터 쪽을 맡게 될 거야. 에스프레소 내리는 법이라던지, 이런 거 전혀 모르지?"
"넵!"
"허, 솔직해서 좋다."
"헤헤헤."
"카운터에서 주문 받고, 중간에 사람 없을 때는 청소. 시급 구천오백원. 콜?"
사장님이 꽤 진지해보이는 얼굴로 슬기를 쳐다보며 물어왔다. 슬기는 침을 꿀꺽 삼켰다. 좋아, 한 번 해보는 거야.
"콜."
2.
일사천리로 일이 진행되었다. 알바를 하기로 한 지 30분도 채 지나지 않았지만 이미 유니폼도 갈아 입고, 간단한 손님 접대 매뉴얼에 대해서 배웠다. 알바는 배우는 것보다는 실천이지! 사장님이 눈을 찡긋이며 슬기의 어깨를 두어 번 툭툭, 쳤다. 카운터에 가서 일을 하라는 암묵적인 신호다. 이렇게 알바가 되는 거구나. 생각보다는 간단하고, 생각보다는…… 귀찮구나. 계속 뻣뻣하게 서있으려니 다리가 저려왔다. 내가 이거 잘 할 수 있을까, 희망보다는 의구심이 드는 찰나에 딸랑거리는 방울 소리와 함께 카페의 문이 열리고 익숙한 음성이 들려왔다.
"저 왔어요, 사장님."
너무 익숙한 음성에, 너무 익숙한 향에, 너무 익숙한 말투……. 그 쯤에서야 현실을 부정하려 했지만 이미 때는 늦어있었다. 자신도 모르게 내뱉은 석 자를 후회했다.
"배…… 주현?"
슬기가 말하자 카페에 들어온 여자가 슬기를 쳐다보기 시작했고, 이윽고 그 여자도 슬기를 보고 경악했다.
"ㄴ…, 니가 왜 여기에?!"
뭐야, 둘이 아는 사이야? 이미 얼어 붙어버린 둘과 그 둘의 사이를 궁금해하는 사장님. 아무것도 아니에요. 예전에 한 번 본 적 있어서요. 그래? 그러면 다행이네. 몇 마디 말을 주고 받고 사장님은 잠시 볼 일이 있다며 카페를 나갔다. 그리고 사장님이 나간 자리에는 오묘한 정적과 함께 복숭아 향이 폴폴 흘렀다. 아, 저 복숭아 향. 슬기가 머리를 헤집으며 한숨을 내뱉었다. 김예림이 말했던 예쁘다는 애가 설마 쟨가. 여전히 예쁘긴 한데, 아, 왜 예쁘고 난리야.
"새 알바?"
"으응."
배주현이 유니폼으로 환복하고, 모자를 쓰며 간단히 물어왔다. 어물쩡 늘어지게 으응, 이라고 얘기를 해서인지 슬기는 자기 자신이 한층 더 바보같아진 것 같았다. 배주현이 손거울로 제 앞머리를 체크하는 것을 슬기는 멀뚱히 쳐다보고만 있자 주현이 신경쓰인 듯 인상을 찌푸리며 따지듯 입을 열었다.
"뭘 봐."
배주현 매뉴얼 1. 배주현은 기본적으로 장착된 싸가지가 대단하다.
여전히 너는 이 년전의 그때처럼 좆같게 싸가지가 없었고, 여전히 좆같게 예뻤고, 더 좆같게도 아무렇지도 않게 행동하는 것을 잘했다.
3.
강슬기는 뼛속부터 레즈비언의 피를 타고 났다. 어릴 적부터 아빠를 뺀 남자는 상종조차 하지 않았다. 시원시원하고 잘 웃는 성정이라 많은 여자아이들이 슬기를 좋아해서 항상 주위에는 여자아이들이 끊이질 않았다. 슬기도 철 없는 남자아이들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는 것도 한 몫했다. 그렇게 여중, 여고를 나왔고, 강슬기는 자연스럽게 여자에 익숙해졌고, 여자를 사랑하게 되었다. 그 사실은 슬기와 꽤 친하다면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슬기는 여자가 좋았고, 섹스하는 것도 좋아했다.-실제로 강슬기는 스무 살이 되자마자 레즈바에서 살다시피 한 전적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슬기가 좋아하지 않는 것은 '사귀는 것'이었다. 섹스하는 건 좋은데 사귀는 게 싫다는 것은 참으로도 모순적이면서도 어찌보면 이해되는 말이었다. 밀고 당기느니, 마음을 떠본다던지 하는 것들은 딱 질색이었다. 방은 더럽게도 안 치우면서 지저분한 연애는 연애로도 치지 않았던 슬기였다. 깔끔하고, 깨끗하게. 몇십 년이 지나도록 바뀌지 않는 슬기의 신조였다. 그리고 그 신조는 당연하게도 섹스에도 해당되었다.
평소 잘 싫증이 나는 타입이라 피아노 학원에 다니게 해달라고 떼를 써놓고는 일주일만에 그만두고, 또 기타를 배우겠다고 호기롭게 방과후에 등록을 했다가 손가락이 아프다고 풀썩 그만두었다. 그렇게 강슬기의 손을 거쳐간 것들이 좀 여러 개였어야지. 사귀는 것도 똑같았다. 자신에게 고백하는 것을 굳이 거절하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헤어지겠다는 것을 말리지도 않았다. 오면 오는대로, 가면 가는대로 보내고 보냈다. 얘랑 몇 주 사귀었다가, 얘랑 몇 주 사귀었다가. 제일 오래 간 게 한 달 조금 넘었었나? 왜 그렇게 사귀는 사람을 자주 바꾸냐는 물음에는 배시시 웃으며 혼자면 외롭잖아, 라고 대답하는 슬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슬기의 무엇이 그렇게 좋았는지 그녀와 사귀고 싶어하는 여자는 끊이질 않았다.
"네가 여지를 주니까 애들이 계속 너한테 고백하는 거 아니야. 이 미련 곰탱이가 어떻게 애들을 꼬시지? 집 꼬라지만 보면 벌레만 꼬여야 정상인데."
"야. 내가 사귀던 섹스를 하던 니가 알 바야?"
"니 알바 구하는 건 내 알 바지."
"씨바아알……. 넌 씨발 알바몬도 아니고 알바충이냐? 존나 졸졸 따라오는 맞춤 서비스네."
"그러니까 알바 한 번만 하라고. 너 솔직히 휴학하고 한 거 뭐 있냐. 쳐먹고 자고 매일 써니텐인지 써니핫*인지 하는 거기서 하루 종일 죽치고 앉아 있고."
*슬기가 자주 가는 레즈바 이름.
예림이 심각한 표정으로 슬기에게 말했다. 너 진짜 인생을 막 살지 말아봐. 열심히 하면 될 텐데 왜 그러냐. 슬기는 의연한 표정을 한 채 답했다.
"면허 땄잖아."
"그 이후로 차랑 담 쌓고 살잖아."
"아, 알아서 할게!! 넌 내 엄마도 아니면서 왜 그러냐?"
예림이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슬기의 목을 팔로 감싸 헤드락을 걸었다. 아, 아파!! 슬기가 예림의 팔을 툭툭 치면서 팔을 놓으라고 했지만 예림은 끝까지 놓지 않은 채 슬기에게 말했다.
"너 사람새끼 되라고 하는 말이지. 여태껏 첫사랑도 없었으면서 사람 마음 가지고 노는 거, 그거 진짜 쓰레기 같은 짓이야."
"몰라, 내 좆대로 살 거니까 신경쓰지 마."
슬기가 제 목에 감겨져 있던 예림의 팔을 푼 채 말했다. 예림이 무어라 말하기도 전에, 슬기가 먼저 자리를 떴다. 성큼성큼 걸어가던 슬기를 바라만 보던 예림이 피식 웃었다. 슬기가 갑자기 뒤를 돌더니 예림에게 고함을 질렀다. 아, 그리고 너, 아무것도 모르면서 넘겨짚지 마라?!
예림이 멀뚱한 표정으로 내가 뭘? 이라고 되물어도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4.
강슬기에게도 첫사랑이 있었던가?
5.
슬기가 갓 스무 살이 되어서 레즈바에서 눌러앉았을 때의 얘기이다. 슬기가 자주 다니는 레즈바는 오전에는 청소년들도 들어올 수 있는 카페로 운영되지만, 밤에는 성인만 들어올 수 있다. 슬기는 청소년 시절 레즈바에 너무 들어가고 싶어했다. 하지만 야자가 끝나고 헐레벌떡 그곳으로 뛰어가면 이미 그 곳은 강렬한 EDM 음악과 술으로 물들어 버린지 오래였다. 교복을 입은 자신이 어울릴 수 없는 곳이라는 말과도 일맥상통했다. 그 세상으로 한 번만이라도 들어가보고 싶었던 슬기는 안으로 들어가보려고 별 짓을 다했지만 결국 들어갈 수 없었다. 가끔 가다가 주말에 그 카페에서 시간을 때울 때가 있었는데, 오후 10시가 되면 귀신같이 슬기를 쫓아내는 언니 하나가 있었다. -그 언니가 왜 그렇게 미웠는지는 아직도 모를 일이었다- 지금은 당당히 성인으로써 영업종료시간까지 죽치고 앉아있을 수 있음에 얼마나 감사한지 몰랐다.
레즈바는 꽤 편안한 분위기로 그 안에서 공부를 하던지, 책을 보던지, 떡을 치던지 아무거나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었다. 카페에서 아메리카노를 쪽쪽 빠는 아이도 있었고, 구석진 곳에 있는 방음 시설이 철저하게 되어있는 방-미성년자는 절대 당연히 출입금지다-에 손을 꼭 잡고 들어가는 무리들도 있었으며, 아무 생각 없이 앉아있는 아이도 있었다.
강슬기. 아무 생각 없이 앉아 있는 아이들 중 하나. 한 손으로 턱을 괴고 발을 이리저리 교차해가며 콧노래를 부르는 아이. 대충 부르는 노래였음에도 꽤 듣기 좋은 감미로운 멜로디의 주인공. 레즈바에 가면 시간대에 관여받지 않고 한 번쯤은 마주치는 아이. 뭐 하나도 모를 것 같은 얼굴인데 왜 맨날 오는지 몰라. 사람들이 강슬기에 대해서 말한다면, 대부분 이런 내용이었다.
강슬기는 유난스럽게도 오버핏 후드티로 깡마른 몸을 감추고 꼭 마스크를 끼고 다녔다. 아침 마실 나오듯 오픈 시간인 오후 1시에 맞춰 슬리퍼를 질질 끌고 언니, 출석이요. 무덤덤하게 내뱉는 얼굴에 여기서 일해보지 않겠냐는 질문을 받아본 적이 있었던 적도 있었다. 여기서 청소만 하면 월급도 짭짤하게 주고, 공짜로 모든 시설을 이용할 수 있다는 사탕발림에도 우리의 강슬기는 거절했다.-강슬기는 알바에 대해서는 대단한 끈기를 자랑했다- 저는 여기 섹스하러 오지, 청소하러 오는 거 아니에요. 한 마디만 더 하면 나한테 부서진다라는 표정을 한 슬기의 대답에 꽁무니를 빼며 미안하다며 사과하는 관리자의 낯이 볼 만했다.-그리고 슬기의 등급이 VVIP로 올랐다는 소문이 한동안 돌았다-
강슬기는 구분을 잘 짓는 사람이다. 자신에게 해가 될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을 잘 구분하고, 자신이 웃어주어야 할 사람과 쌍욕을 해야 할 사람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대부분 강슬기는 모두에게 웃어주었다. 그런 슬기에게 호감을 가지지 않을 이유는 없었다. 얼굴도 이쁘장하고, 몸매도 좋으면서 왜 안 꾸미질 않느냐는 물음에는 너무 이쁜 사람들이 많아서 내놓고 다니기 민망하다는 답을 내놓았다. -대부분 그 대답을 들은 사람들은 어이없어했다-
하지만 레즈바가 아무리 동네 책방처럼 푸근한 분위기라고 해도 '레즈바'는 '레즈바'다. 어떻게든 한 번 자보려고 하는 사람들의 낙원에서 강슬기는 가장 반대의 방법을 택했다. 그리고 그 방법은 꽤 잘 먹혔다. 강슬기는 꽤 그 방면에서 유명한 사람이었다. 정작 자신이 눈치없는 곰탱이에 아무 생각도 없어서 그렇지.
"오늘도 왔냐?"
"너도잖아."
아이라인이 한껏 번져 있는 여자를 보며 슬기는 꽃받침을 하고 그저 웃었다. 박수영, 집 갈거야? 그러면 뭐. 모텔이라도 가실까? 수영이라고 불린 여자가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슬기 앞에 얼굴을 뒀다. 꽤 가까운 거리였음에도 슬기는 눈 하나도 깜빡하지 않은 채 말했다. 호텔이면 더 좋고. 헤실헤실거리며 웃는 것과 입에서 나오는 말들은 꽤 거리감이 있었다. 푸흐흐, 바람소리를 내며 나오는 웃음소리가 매력적이었다. 수영은 슬기에게서 풍기는 라벤더 향을 들이마셨다. 너 냄새 좋다. 늘 그랬잖아. 하긴. 수영의 웃음 소리가 작게 울렸다.
"나 오늘 피곤해."
"그럼 나중에 연락해."
"응."
안녕, 짧은 인사와 함께 수영이 문을 열고 레즈바를 나갔다. 아, 심심해. 슬기가 심통난 얼굴로 머리를 몇 번 헤집었다. 할 게 없나 돌아보고 있던 와중에, 누군가가 슬기의 뒤에서 백허그를 해왔다. 갑작스러운 스킨십에 슬기가 놀란 표정으로 몸을 꼿꼿이 세우며 잠시 얼굴을 굳혔다. 헉, 헉…… 숨을 헐떡이며 살짝 고개를 숙이는 그였다. 코 끝을 찌르는 복숭아 냄새에 슬기가 잠시 눈살을 찌푸렸다. 이내 슬기에게 백허그를 해온 여자가 조용히 슬기의 귀에 입을 대고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말을 하기 시작했다.
"갑자기 안아서 미안."
"괜찮아. 무슨 사정이라도 있어?"
"응. 잠시만 이해해줘."
"그렇구나."
오늘 먹을 점심 메뉴를 말하듯 의연스러운 둘의 태도는 만난 지 몇 분조차 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잊게 만들 정도였다. 복숭아 향을 풍기는 여자가 슬기의 목에 팔을 감싸며 슬기에게 몸을 더 붙였다. 살갗이 천천히 닿아왔다. 슬기는 진한 복숭아 향에 눈살을 찌푸렸다. 이거 요즘 유행하는 사기 수법 아닌가 싶었던 와중에 여자가 슬기의 얼굴을 제 얼굴로 돌리자 슬기는 생각을 고쳐먹었다. 나한테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초면에 미안한데, 우리 사귀는 척 좀 하자."
"척이라면 얼마든지 가능해. 진짜 사귀는 거 말고."
"알았어. 이제 우리는 여기 있는 수많은 커플들 중 하나인 거야. 알았어?"
"좋아. 근데…… 너 성인이냐? 아무리 봐도 얼굴이 고딩으로밖에 안 보이는,"
"믖드그."(맞다고.)
이거 좀 찜찜한, 무슨 말을 하려는 슬기의 입을 살며서 누르며 여자는 조용히 속삭였다. 나 성인 맞다고. 지갑을 우악스럽게 열어서는 반짝반짝한 민증을 보여주는 것이 꽤 순수해보여 슬기가 푸흡, 웃었다.
"푸흡, 알았어."
"그러니까 한 번만 더 시끄럽게 하면 확 키스해버린다."
"그거 좀 끌리는데. 시끄럽게 하면 되는 거야?"
"……초면이지만 너 진짜 싫다. 컨셉이야, 진심이야?"
"진심 반, 컨셉 반.“
슬기가 여자의 눈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헤실헤실 웃었다. 아, 진짜. 머리를 몇 번 헤집다가 슬기의 소매를 잡고 방음 방으로 뛰는 그녀였다. 질질 끌려가면서도 뭐가 그리 좋은지 헤헤 거리던 슬기가 방음처리된 방의 문턱에 걸려져 넘어졌다. 어, 어어-! 무게중심이 앞으로 쏠려 여자와 함께 풀썩, 넘어졌다. 아야, 아파. 헤롱거리는 정신을 부여잡았을 때는 이미 요상한 자세를 한 채 여자의 위에 엉거주춤 누워있고, 그리고…… 입술을-절대 의도치 않게- 맞댄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으악!!! 여자는 온갖 비명을 지르며 슬기의 얼굴을 밀었고, 슬기는 우악스럽게 잡햤던 제 뺨을 그저 만지고 있을 뿐이었다.
"진짜……!"
"이건 고의가 아니었고, 아씨…, 나도 하고 싶어서 한 줄 아냐?!"
"지금 그게 중요하냐?"
"아, 몰라. 우리 어쨌든 말로만이라도 사귀는 사이 하는 거잖아."
"……."
"사귀는 사이라면 이 정도는 해줘야 되는 거 아냐?"
슬기가 서로의 숨소리까지 들릴 만큼 다시 얼굴의 거리를 좁혔다. 이야, 가까이서 봐도 이쁘다. 때 아닌 감탄을 하고 있던 슬기를 여전히 깔려 있는 채로 어이없다는 듯 쳐다보던 여자가 말했다.
"원래 드라마 같은데서는 이럴 때 서로 기겁하면서 떨어지지 않나."
"그건 드라마지. 우리가 꼭 드라마 같을 필요 있나."
이미 영화 정도는 되는 거 아니었나? 슬기가 여전히 얼굴을 가까이 댄 채 낮은 음성으로 말하며 웃었다. 푸스스 퍼지는 웃음소리가 꽤 매력적이었다. 여자가 껄끄러운 표정을 하며 입을 열었다. 우와, 진짜 나 꼬시려고 하네. 라벤더 향 풍기면서? 초면에 되게 저돌적이다. 그런 소리 자주 들어. 칭찬 아닌데. 초면에 다짜고짜 안은 사람이 말이 많다. 초면에 막 덮치는 사람은 조용히 하지. 말로는 절대 안 지네. 원래 승부욕이 좀 강해서. 전기가 파스스, 찌르듯 둘의 분위기가 팽팽했다.
주현이 슬기의 눈을 쳐다보며 알 듯 말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 헤헤헿. 바보 같은 웃음이 정적을 깼다. 혼자 무슨 생각을 하는지 슬기가 바보같이 웃자 여자의 얼굴이 조금 더 일그러졌다. 똥 피하려다가 토 밟은 기분. 여자의 표정을 정의하면 딱 그랬다. 아, 나오시고요. 슬기를 내동댕이 치듯 바닥에 던지고 다시 일어난 여자가 옷에 묻은 먼지를 털어냈다. 아까 슬기가 취했던 자세가 꽤 이상했는지 지나가는 여자들이 "문은 닫고 사랑 나누세요~" "좋을 때다." 와 같은 말들을 한 마디씩 던져댔다. 뜻하지 않은 관심을 받아 부끄러워진 슬기가 얼굴을 붉히며 방으로 총총 들어와 문을 닫았다.
그리고 흐르는 숨 막히는 정적. 여자는 딴 곳을 쳐다보고 있었고, 슬기는 여전히 그 여자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머리에 구멍이 날 정도로 신경쓰이게 쳐다보는 슬기의 시선 때문에 땀이 삐질삐질 흘러나왔다. 슬기가 어색해진 분위기를 풀려 말을 꺼냈다. 너 페로몬 갈무리 안 하냐? 나 꼬시려고? ……아니거든. 너 아까 솔직히 찔렸지. 아니라니까? 아, 알았어. 그나저나, 왜 갑자기 날 안은건데? 말하자면 길어. 여자가 한숨을 쉬며 입을 열었다.
"어떤 애한테 걸려가지고. 알던 사이였는데 술 마셔서 뻗은 사이에……,"
이상한 짓 하려고 들어서. 여자가 말끝을 흐렸다. 레즈바는 옛날에 친했던 친구랑 자주 와 봐서 여기로 피신하려 왔는데, 혹시 몰라서 도움을 청할 사람이 필요했어. 네가 그나마 좀 착하게 생겨서 도와달라고 한 거고. 당황스러울 수도 있었을 텐데 안 물어봐줘서 고마워. 부담스러울 정도로 여자의 눈을 쳐다보는 슬기를 애써 피하며 여자가 말했다.
"그렇구나."
"아까부터 왜 그렇게 부담스럽게 쳐다 봐?"
아까부터 헤실헤실, 바보도 아니고…… 여자가 말을 흐렸다. 원래 웃상이냐 물어보는 여자의 물음에 슬기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강슬기는 알아주는 얼빠다. 인성이 어떻고 성격이 어떻고는 아무래도 상관도 없었고, 일단 얼굴만 좀 이쁘면 애가 헤실헤실, 정신을 못 차렸다. 아까 다짜고짜 안고 있어서 얼굴도 제대로 못 봤는데-언뜻 비친 얼굴조차도 존나 예뻤다- 방에 들어와서 여자의 얼굴을 자세히 보니 이쁜 건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물론 그 여자의 표정이 좋지는 않았지만.
슬기는 그런 여자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이름을 묻기에 바빴다. 그래. 뭐 이렇게 된 것도 인연이니까. 이름이 뭐야? 난 강슬기. 슬기가 특유의 티끌 없는 해맑은 웃음을 지으며 여자에게 손을 뻗었다.
"배주현."
탁-. 주현이 슬기의 손을 가볍게 쳐낸 채 이름 세 글자를 내뱉었다. 배주현 매뉴얼 2. 배주현은 남을 생각하지 않는 버릇이 있다. 눈 깜짝할 새에 악수를 거절당한 슬기가 눈을 끔뻑거렸다. 사람 무안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네.
"오늘은 고마웠어."
"응."
"다음에는 이런 데서 안 마주쳤으면 좋겠네."
할 말은 많았지만 불평은 고이 마음속에만 담아둔 채 슬기는 여전히 웃으며 주현에게 억제제를 건네면서 말했다. 너 향 존나 강해. 그러니까 이거 먹으면 잠시 동안은 냄새 안 날테니까 그 이상한 놈한테 들킬 일도 없을……,
"나, 억제제 알레르기 있어."
6.
슬기는 벙찐 채 입을 떠억 벌리고 있었고, 주현은 그럼 이만. 이 한 마디를 내뱉은 채 슬기의 어깨를 치고 유유히 걸어갔다. 생…… 생각해줘도 지랄이야. 슬기는 나갈 뻔한 어이를 간신히 붙잡았지만 얼이 빠진 듯한 표정은 아무리 애써봐도 감춰지지 않았다.
말이 되는 게 있고 안 되는 게 있지, 요즘 같은 세상에 억제제 알레르기는 무슨 억제제 알레르기야. 그냥 나 싫다는 거 돌려 말하는 건가? 에이, 내가 도와줬는데 그럴 수가 없지.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럴 수 있었다-
그로부터 이 년이 흘렀다. 배주현은 잊을 만 하면 머리에서 주현에 대한 생각을 떨쳐내려고 애썼지만 주현은 웬만한 연예인은 뺨 치고도 줘 패버리는 마스크의 소유자였고, 슬기는 그런 얼굴을 사랑했다. 이성은 본능 앞에서 굴복하게 되어있다. 이성은 그 개싸가지새끼를 잊으라 하지만 자꾸 솔솔 풍기는 복숭아 향과 그 얼굴이 계속 머릿속에서 매치가 되는 걸 어쩌란 말인가. 게다가 키스 사건 때문에 배주현 얼굴만 보면 몰랑한 젤리 입술만 눈에 띄었다. 내가 이렇게 밝히는 사람이었던가, 슬기는 혼자서 온갖 궁상을 다 떨었다.
이제 좀 그 사건 잊을 수 있을 것 같은데. 다시 나타나서 배주현은 제 머릿속을 헤집어뒀다. 허나 이상하게도 배주현은 아무렇지도 않은 건지 쓱쓱 행주를 빨고, 커피를 내리고, 음료가 다 되었다고 제게 말했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아메리카노 끝났어."
"내가 컵홀더 끼울게. 이리 줘."
"모자나 바로 하고 주문이나 받아. 오늘 처음이면서 뭘 한다고."
"……으응."
그리고 아무렇지도 않게 툭툭 말을 던지는 배주현은 너무나도 아무렇지 않아서, 그래서 더 불편했다. 지, 지가 ㅁ, 뭔데 챙겨주는데?!
배주현 매뉴얼 3. 배주현은 츤데레처럼 은근슬쩍 챙겨주는 경향이 있다. 오히려 주현은 평소와 같은데, 슬기 혼자서 모든 행동에 많은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것만 같아 더 부끄러웠다. 손으로 부채 모양을 만들어 얼굴을 애써 식혔다. 주현이 진동벨을 울려서 손님을 불러 음료를 건넸다. 손님이 나가고 문이 닫히자, 그제서야 주현이 한숨을 돌리며 카운터 쪽에 비치되어 있는 의자에 앉았다. 아, 힘들다. 주현이 모자를 잠시 벗어두고 벽에 몸을 기댔다. 아, 덥다. 아직 4월인데, 더워? 응? 아, 내가 몸에 열이 좀 많아서. 헤헤헿, 슬기는 또 바보 같은 웃음을 내비쳤다. 재밌는 것도 많다. 주현이 한숨을 내뱉으며 천장을 올려다봤다. 슬기가 그 옆에서 무언가를 말하려 입을 움찔거리자 주현이 무덤덤하게 물었다.
"뭐."
"응?"
"뭔데."
"아무것도 아닌데?"
헤헤헿. 어색하게 웃는 슬기를 보며 주현이 머리를 두어번 헤집었다.
"말할 거 있으면 말해. 사람 답답하게 하지 말고."
"……."
"내가 불편해? 그 때 그 일 때문에?"
"응? 아니? 절대 아닌데? 전혀 생각나지도 않았는데? 완전 까아맣게 잊고 있었는데?"
"다행이네. 만약에 그런 거라면 나도 할 얘기 많은데."
"……헤헤헿.“
"뭐 때문에 나 할 얘기 많아요, 하는 표정으로 아무 것도 안 하고 있을까?"
"……."
"왜 아까부터 나 쳐다보고 있는데."
배주현 매뉴얼 4. 배주현은 눈치가 존나 빠르다.
들켰다. 슬기가 머리를 긁적거렸다. 그게 그렇게 티났어? 음, 딱히 거기에 이유가 있는 건 아니구…… 슬기가 말끝을 흐리며 뜸을 들였다.
"오랜만에 보니까 감회가 새로워서. 니 얼굴도 그렇고, 니 향기도 그렇고. 그리구……."
"그리고?"
"이 년전에, 그러니까, 우리 막 키ㅅ……!"
"쉿. 다른 사람들 다 듣는다."
주현이 슬기의 입 앞에 검지손가락을 대며 얼굴을 가까이 하자 슬기의 얼굴이 또 화끈 달아올랐다. 주현은 슬기의 반응이 웃기다는 듯 낮은 웃음을 지었다. 너 그때보다 좀 귀여워진 것 같다? 이번엔 칭찬이지? 좋을 대로 생각해.
"그래서, 나 왜 쳐다보고 있다고?"
"예뻐서."
그 말을 내뱉고 슬기는 배시시 웃어보였다. 만약 우리가 이런 곳에서 처음 만났다면 그때보다는 좀 더 화목한 사이였겠지? 우린 다 좋은데 타이밍이 너무 안 맞았어. 거기서 만난 것부터 일단 문제였다니까. 둘 사이에서 복숭아꽃 향기가 솔솔 났다. 이 년 전의 그때처럼.
7.
강슬기에게도 봄이 있었다고, 슬기는 그 순간 깨달았다.
8.
원래 그런 순간이 있다. 무의식 중의 것을 의식으로 끌어올리는 순간. 그제서야 사람들은 자기도 모르게 숨겨뒀던 본심을 확인한다. 지금이 딱 그랬다.
"무엇을 도,"
"아아."
"네?"
"아아 몰라?"
"아…, 네."
무례한 중년의 남성이 고함을 지르듯 주문을 하고 의자에 풀썩 앉았다. 뭐…, 뭐야 시발. 슬기가 당황한 낯을 애써 가리며 주현에게 말했다. 아메리카노 하나만, 얼음 넣어서. 응. 주현도 애써 내색하려 하지 않았지만 꽤 기분이 나빴다. 지가 뭔데 우리 슬기한테, 아니, 우리까지는 아닌데. 어쨌든 저 새끼 왜 저러는 거야? 대낮부터 술 쳐먹었나. 주현은 여러 생각들을 하다 무심코 카운터에 뻣뻣하게 서 있는 슬기를 멍하니 쳐다봤다. 강슬기는 참 신기했다. 그렇게 안 생겨서는 레즈바죽순이고, 그렇게 안 보여서는 갑자기 카페 알바를 한답시고 여기 오고. 저 성질 죽이려면 꽤 힘들겠는데. 주현이 피식 웃으며 에스프레소를 내렸다. 얼음을 동동 띄우고, 컵홀더를 끼우고. 진물이 나도록 해 와서 이젠 눈 감고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아이스 아메리카노 하나 나왔습니다!"
그리고 배주현과 강슬기가 카페에서 재회하게 된 역사적인 순간에, 대미를 장식한 것은 다름 아닌……
"왜 얼음이 띄워져 있어?"
"ㄴ,네에?"
진상이었다. 개씨발뚱땡보진상 말이다. 슬기는 내가 지금 잘못 들은 거겠지, 라고 되뇌며 바보처럼 되물었다. 슬기는 매번 중요한 순간에 바보같이 말끝을 늘이는 버릇이 있었다. 이번에도 역시 바보같았어. 속으로 자책하는 것도 잠시, 뚱땡보의 얼굴이 붉어지며 언성이 높아지기 시작했다.
"내가 아메리카노 달라고 했지, 언제 얼음을 띄워달랬어? 아직 밖에 다들 긴 팔 입고 다니는 거 안 보여?!"
"……."
내가 여기 알바가 아니었더라면 다 뒤집어 엎었을 텐데. 슬기는 조용히 속으로 욕을 읆조리며 애써 침착하려 했다.
"저기, 손님이 아이스 아메리카노,"
"당장 아메리카노 다시 만들던지, 아니면 환불하던지."
어이없는 뚱땡보때문에 미치고 돌아버릴 지경이었다. 그때였다. 주현이 나선 것은. 아저씨. 뭐? 지금 아저, 지금 진상 짓 하시는 거 본인이 더 잘 알고 계시겠죠.
강슬기는 묵사발처럼 입 꾹 닫고 주현을 쳐다보고 있었고, 주현은 시종일관 무표정으로 손님에게 대응했다. 원래 사람은 무표정일 때 가장 무섭다는 것을 주현을 통해 다시 한 번 깨달은 슬기였다. 결국 아메리카노는 환불을 해주기로 하고 그 뚱땡보는 지 맘대로 됐으면서 뭐가 그리 짜증이 나는지 투덜거리면서 카패를 나갔다. 씨바 복숭아 새끼 주제에……, 라며 욕을 쓰는 것도 잊지 않고 말이다.
오히려 주현은 덤덤했고, 그 말을 들은 슬기가 노발대발하면서 분을 참지 못했다. 야, 진정해. 아니 저 페로몬도 참이슬향나는 씨바새끼가!!! 그거 내가 젤루 좋아하는 소준데. 그, 그러면 좋은데이? 싸물어. 넵.
주현은 못 말린다는 표정을 지으며 슬기를 탕비실로 끌었다.
"어어, 어디 가?"
"기분 잡칠 때마다 가는 곳."
"어딘데?"
"가 보면 알아."
"응."
"……그리고, 알바하다보면 저런 좆같은 새끼들이 세상에 꽤 많아. 나는 어릴 때부터 알바해서 이제 아무렇지도 않은데, 너는 모르니까. 이제부터는 화내지 말고 신경쓰지 마."
"……으응."
배주현 매뉴얼 5. 배주현은 보이는 것보다 훨씬 그 깊이가 깊다. 그것이 경험이든, 상처든, 무엇이든 간에. 발이 있으면 좀 걸을래. 끌고 가는데도 한계가 있거든. 주현이 괜히 툴툴거리며 슬기에게서 제 어깨를 살짝 뺐다. 슬기는 주현을 따라 총총 뛰어갔다.
"세상에는 좆같은 게 너무 많은데, 덜 좆같은 건 희박해. 그 덜 좆같은 걸 찾아냈을 때 그 기분이 어떤지 넌 모르지."
모른다는 걸까, 아니면 모르냐며 물어오는 것이었을까. 슬기는 주현의 말을 잠시 곱씹다가 다시 되물어왔다.
"그러면 처음에는 좆같은 것 같았는데, 알고보니까 덜 좆같은 것이었을 때의 기분은 어떤지 알아?"
"잘 알지. 지금 바로 여기 있는데."
"으응?"
주현이 슬기의 손목을 잡고 '탕비실'이라고 적힌 팻말이 있는 문을 열고 들어갔다. 슬기가 바보같은 표정을 하며 물어오자 주현이 헛웃음을 지으며 점점 거리를 좁혀왔다. 어어, 야, 너 왜, 그러냐……. 슬기가 엉거주춤한 자세로 벽에 등을 댔다.
"슬기야, 강슬기."
"……응."
"나는 거짓말을 한 적이 없어. 단 한 번도. 내가 맨날 페로몬 풍기고 다녀서 너도 나보고 억제제 먹으라고 했잖아. 근데 난 억제제 알레르기가 있고. 계속 의식하는 티 안 내려고 한 것도 불편할까봐서고, 굳이 내가 페로몬 갈무리 안 하는 것도 사람 하나 꼬셔보려고 하는 거고."
"……."
"처음에는 널 마주쳤을 때는 뭔 이런 좆같은 게 다 있지, 했는데 너무 기억에 남는 거야. 곱씹어볼수록 예쁜 것 같고, 곱씹어볼수록 귀여운 거야."
"……."
"내 인생에서 가장 덜 좆같은 걸 이제서야 찾아낸 것 같은 느낌."
슬기야, 나긋한 음성에 슬기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슬기가 평소 알고 있는 주현은 냉소적이고 이성적이었더라면 지금은 완전히 달랐다. 감정적이고, 본능적이었다. 슬기는 주현이 말하는 느낌이 무엇인지 어렴풋이 알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아니, 이미 이 년전 그 때부터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애써 아니라 부정했을 수도.
필연이었다. 알고 지낸 햇수보다도, 평소 친하다고 생각되는 정도보다도, 단순히 외형의 아름다움보다도, 더 앞서가는. 아무 이유 없이 끌리는 본능에 의한 사랑. 주현이 슬기와의 얼굴의 거리를 좁히자, 슬기가 눈을 살며시 감았다. 동의의 표시이자, 곧 다른 것을 의미하는 신호기도 했다.
배주현 매뉴얼 6. 배주현은 키스를 존나 잘한다. (그 이후의 것도)
'SEASON > SPRING' 카테고리의 다른 글
[린슬] 저랑 해요 (0) | 2019.04.21 |
---|---|
[린슬] 곰팅이 (1) | 2019.04.21 |
[옒쓸] WIN-WIN (0) | 2019.04.21 |
[옒쓸] 하나비 스트리트 (0) | 2019.04.21 |
[웬슬] 반복의 꽃말 (0) | 2019.04.21 |